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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가 앉은뱅이책상을 만들어 주는 날이었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원하는 책상이 생기는 것도 이유였지만 연장 다루는 아버지의 솜씨를 구경하는 재미였다. 아버지 연장통에는 만지고 싶은 물건이 많았다.
그날은 처음 보는 물건이 있었다. 연장이 아닌 것 같은데 연장통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저게 뭘까? 눈치를 보다가 둘둘 말린 두꺼운 밤색종이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벌레를 만진 듯 오싹했다. 반사적으로 아버지 눈치를 봤다. 궁금했지만 꾸욱 참았다. 자칫 귀찮게 했다가는 들어가 공부하라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얌전한 구경꾼이자 눈치 빠른 조수가 되기로 한 것이다.
종이를 펼치는 아버지가 마술사 같았다. 설계도였다. 등이 반질반질한 대나무 자도 아버지가 만든 자였다. 귀에 꼽은 연필 입에 문 못, 톱 소리 망치 소리, 아버지의 소리를 속으로 흉내 냈다. 성적 검사를 하고 천자문을 외우게 하는 아버지 보다는 내 몸에 나무 길이를 대보는 아버지가 더 좋았다. 괜히 대문 밖을 한번 내다보기도 했다.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심부름도 빨랐다. 마지막으로 만든 세 개의 서랍은 귀엽기까지 했다. 언니, 나, 동생, 우리도 셋인데...... 가족 같았다.
드디어 아버지는 껄끄러운 물건을 집었다. 일부러 천천히 풀다니 내 속을 알고 있었구나. 아버지 하는 것을 보니 궁금증이 자동으로 풀렸다. 자기 몸으로 상대를 곱게 만들어주는 사포, 나는 아버지가 하는 대로 무늬가 흐르는 방향으로 밀었다. 손이 뜨거워 오른손 왼손 바꿔가며 밀었다. 안 보일수록 모서리일수록 잘 다듬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포를 민 다음 손바닥으로 쓸며 확인을 했다. 털끝도 걸리지 않게 다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가시에 찔릴 수 있다고 했다.
사포를 문지르다 옹이도 알게 되었다. 나무 몸통에서 가지가 뻗어 나갈 때 생긴 자국이라고 했다. 벌레 먹거나 찍힌 자리도 크면서 옹이가 된다고 했다. 나무는 아팠겠다. 검은 돌멩이가 물결에 떠가는 것 같았다. 눈동자 같기도 했다. 이윽고 아버지 말처럼 평생 써도 튼튼할 야무진 책상이 완성되었다.
아버지는 창고에 가서 동백기름 병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이고 힘들다, 아부지 목이 타서 술 대신 동백기름이나 한 잔 할란다”나는 술이라는 말에 철렁했다. 나는 술이 싫었다. 술 마시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갑자기 침울해진 나에게 아버지는 장난말이라며 허허허 웃었다. 오므린 내 작은 손에 기름을 따라 주며 책상에게 먹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 딸같이 이삐다”몇 번이고 했다. 굴려가며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난 눈이 뜨거워졌다. 기름은 나무를 썩지 않게 하고, 틀어지는 것도 막고 벌레도 막아준단다. 기름 먹이는 이유를 들으니 왠지 마음도 먹먹해졌다.
사람도 동백기름을 먹고 건강해진다면 좋겠다. 엄마 몸에 있는 병균도 이 기름이 막아주면 좋겠다. 그래서 아프지 말고 죽지 말고 우리랑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산신령도 도깨비방망이도 다 거짓말이야. 날마다 첫 번째로 기도하는데 엄마는 갈수록 더 아프잖아. 깊이 들어가라 더 깊이 들어가...... 힘주어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나는 사포가 좋았다. 중학생이 되어 읍내 버스정류장 옆 철물점에서 구입하기도 했다. 사포 살 돈이 부족해 버스 타는 걸 포기한 적도 있다. 세 동네 거쳐 6km 비포장 길을 혼자 걸었다. 학생들이 탄 만원버스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모두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창피한 마음도 들었다. 솔밭을 지날 때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모래 뿌리는 눈썹 없는 귀신이 산다고 했다. 달리거나 돌아보면 큰일 난다고 했다. 신작로 돌멩이만 보고 걸었다. 마지막 동산모퉁이를 돌자 우리 동네가 보여도 달릴 수 없었다, 등 뒤는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손에 사포를 꼭 쥐고 걸었다.
여고생이 되어서도 내 사포질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로 간 엄마가 보고 싶을 때도 그랬고 쓰러진 아버지가 불쌍할 때도 그랬다. 남동생은 아버지가 큰집에서 구해다 준 크고 낡은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에 다녔다. 녹이 슨 자전거도 사포로 문지르니 빛났다. 어느 날이었다. 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린 듯“입 벌려봐”했다. “왜?”하는데 “얼른 벌려봐, 무엇인지 알아 맞춰봐”했다. 처음 먹어본 맛이었다. “맛있지?” 맛있었다. 깻잎에 싼 회라고 했다. ‘아나고 회’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는 언니의 들뜬 목소리와 표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깻잎 맛, 초장 맛 오돌오돌 신세계 맛이었다. “이게 그 징그러운 장어라고?” 장어의 생김새와 맛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표정에 모두가 크게 웃었던 저녁이었다. 언니는 도시로 떠났다. 마루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하늘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방으로 들어와 서랍 속의 사포를 꺼냈다. 그리고 사포를 힘주어 문질렀다. 사포를 문지를 때마다 책상도 내 마음처럼 젖었다.
나는 지금, 넙치처럼 누워 천장을 보고 있다. 침대와 몸뚱이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붙어 꼼짝하지 않는다. 불혹에 날 찾아온 다발성경화증 때문이다. 피부와 관절을 사포로 감고 누운 듯하다. 사포도 그냥 사포가 아닌 1단 2단 3단 기능성사포를 감고 누운 듯하다. 찌르다 화끈거리다 떨다, 떨다 떨다 치를 떨다 난리 난리 생난리를 쳐도 사포는 도망가지 않는다. 홍시처럼 부은 다리를 더욱 세게 문지를 뿐이다.
아버지와 책상을 만들던 어린 날이 있었다. 그 날을 떠올리는 지천명을 넘긴 딸이 책상을 만들고 있다. 사방이 옹이다. 박힌 옹이 잘 다듬고 기름먹이면 멋진 무늬가 될까? 야무진 책상이 될까? 털끝도 걸리지 않게 다듬어야 나를 스치는 인연들 나도 모르는 내 가시에 상처 입을 일 없겠지.
침대에 납작 엎드린 넙치가 열쇠를 찾는다. 1단 2단 3단 기능성사포를 감고 열쇠를 찾는다. 통증이 온 몸을 노크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 사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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