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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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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9 20:27:00

한국 장애인사


마지막 황제 순종

 

 

순종(純宗, 1874~1926)은 조선 제27대 왕이다. 이름은 이척이고,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 (正軒)이다.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여흥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고종 12 년(1875) 2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일제의 강요로 고종이 양위하였다. 이에 순종은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1910년 37세가 된 순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8월 29일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후대는 순종을 ‘허위(虛位)의 황제(『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순종 편.)’라 기록했다.

순종에 대한 자료 중 고종의 서양인 전의(典醫)였던 에비슨 박사가 남긴 기록(올리버 R 에비슨 저, 황용수 역(2006), 『구한말 40여 년의 풍경』, 대구대학교출판부.), ‘경술국치를 분개하며 자결한 조선 말기 시인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은 순종에게 장애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에비슨 박사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우리가 조선에 도착했을 때 왕과 민비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맏이는 불행히도 정신박약아였다. 그는 이미 성인이었고 신체적으로는 건장했으나 성적(性的)으로 미발달된 상태여서, 두 번이나 결혼했으나 후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주변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내가 입궁할 때마다 그를 보았지만, 내게 말을 건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일에는 정신이 흐렸지만 사물의 형태나 이름에 대해서는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수천 자의 한자를 익혔으며 글자를 쓰는 즉시 글자의 음을 알 수 있었지만, 의미는 몰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글자들을 불러 주면 받아쓸 수는 있었지만, 이들 글자를 결합하여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단 한번이라도 만나 본 사람들을 항상 기억했으며 이름을 거침없이 부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호(好), 불호(不好)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일이 결코 없었다.(올리버 R 에비슨 저, 황용수 역(2006), 같은 책, 532~533면.)

위의 자료에서 ‘맏이’는 순종을 의미한다. 에비슨 박사는 순종이 놀라운 기억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실제로 순종은 기억력이 매우 좋아 계보나 의례에 뛰어났으며, 시계 수집에도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2008), 『왕조의 마지막 풍경』, 동녘, 45면.)

하지만 에비슨 박사는 순종이 글자의 의미는 몰랐으며, 그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또한 신체적으로 건장하였으나 성적(性的)으로는 미발달된 상태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에비슨 박사의 주장은 순종에게 ‘지적장애’ 요즘 용어로 자폐증이 있다고 보았다.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황태자가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복록이 그치지 않고 장수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나라의 경사는 그 일에 따라서 각기 명칭이 같지 않지만 임금의 장수를 경하하는 의식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들을 두루 상고해 보건대 언제나 경사를 빛내는 의식을 성대하게 차렸지 간소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父皇) 폐하께서 51살이 되고 왕위에 오른지 40년이 되는 두 가지 큰 경사가 겹친 경사스러운 해이며 또한 우리 왕조에서 보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그러니 그 의식은 마땅히 이전보다 더 성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소자(小子)가 폐하의 장수를 기뻐하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는 생각에 해 드리고 싶은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예법입니다.

응당 시행하여야 할 예법으로서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면 애당초 이 소자의 청을 기다릴 필요도 없지 만, 상신(相臣)들과 예관(禮官)들이 반드시 이 아들이 말한 다음에 거행하는 것도 역시 전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황 폐하의 크나큰 공로와 훌륭한 업적은 고금에 뛰어났습니다. 오랜 나라를 넓혀 새로운 명(命)을 받았고 대업(大業)을 일으켜 왕통을 전하였으며 원구단에 슬기로운 조상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내고 다섯 임금을 황제로 추존하였으니, 모든 귀신들이 모두 흠향하고 온갖 예법이 충분히 갖추어졌습니다.

대체로 선대를 훌륭하게 잇고 왕통을 물려받은 자리에 올라 크나큰 공적을 쌓음으로써 전대의 업적을 더 빛내고 자손만대 무궁하게 태평세월을 누릴 터전을 닦은 것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크나큰 결단을 내려 모든 권한을 쥐고 참작하여 줄일 것은 줄이고 보탤 것은 보탠 결과 온갖 법도가 다 정돈되어 위엄은 만방에 떨치고 혜택은 백성에게 크게 베풀어졌습니다.

재물이 크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받들면서 칭송하니 부황 폐하의 높고도 큰 공로와 업적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금 글자로 아로새긴 역사책은 방에 차고 넘치게 만들어도 그 사적을 비슷하게나마 묘사할 수 없으니 훌륭한 덕을 드러내어 휘호를 올리고 잔치를 열어 장수를 경하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부황 폐하께서 겸손하게 거절하시더라도 사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자에게는 하늘, 땅과 더불어 끝이 없는 지극한 통한(痛恨)이 있습니다. 우리 모후(母后) 폐하께서는 아름다운 덕이 태임(太任)과 태사와 나란하여 종사(宗社)에 공을 남기시고 이 아들에게 은택이 미치어 오늘까지도 도움을 받는 것이 실로 많건만 존호를 올린 데서는 아직 빠진 글자가 많습니다.

게다가 금년은 우리 모후 폐하의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는 해로서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아득히 옛날과 같건만 봄가을 가리지 않고 능의 나무를 부여잡고 통곡하여도 갈수록 더욱 아득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쁨을 표현할 곳이 없고 오직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기회 에나 지극한 정을 조금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니 부황 폐하께서도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폐하 앞에 외람 되게 아뢰오니 부황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내년 정월 초하룻날 백성에게 고포(告布)하고 경하하는 의식에서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고 존호를 추상하는 일과 내진연(內進宴)과 외진연(外進宴)을 마련하는 등의 절차를 모두 속히 예원(禮院)에서 전례대로 마련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조종(祖宗)의 떳떳한 법을 따르고 아래로는 신하와 자식의 큰 소원에 부응하여 주소서.” 하였다.(『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1901) 12월 22일(양력)조.)
 

 

 

위 글은 1901년 황태자였던 28세의 순종이 고종에게 올린 글이다.

그는 고종의 등극 40년을 축하하며 존호를 올리고 연회를 베풀 것을 청했다. 순종이 고종에게 쓴 글을 보면 그는 왕실의 일을 두루 이해하고 영민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순종이 글자의 의미를 모르고, 사리 분별을 못하거나 정신이 흐리고, 주변 일에 관심이 없다는 에비슨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순종에게 ‘지적장애’의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왕태자(王太子)가 올린 상소에, “신(臣)은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이 없는 몸으로 외람되게 저사(儲嗣) 의 자리에 있다 보니 마음이 늘 송구스러운데 어제 내린 칙지(勅旨)를 받고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폐하의 이 조치는 큰 의리로 결단한 것인 만큼 신과 같은 어린 처지로는 감히 사정(私情)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태자의 지위는 중요한 만큼 오늘날의 신의 처지로는 사실 잠시도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피눈물을 흘리며 우러러 하소연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 땅 같은 부모는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처분을 내림으로써 사사로운 명분을 편안히 해 준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정리(情理)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응당 처분을 하겠다.” 하였다.(『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1895) 8월 23일조.)

위 기록은 당시 왕태자였던 순종이 8월 23일 상소문을 올려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는 내용이다. 이는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45세에 시해된 후, 8월 22일 일본의 압력에 의해 고종이 황후 민씨를 폐서인(廢庶人) 조처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그 죽음의 배일 또한 밝히지 못하자 순종은 비통한 마음을 누르며, 자식 된 도리와 마음을 표현하고자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왕태자의 뜻을 모르지 않았던 고종은 상소문을 받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조령을 내리기를, “짐(朕) 은 왕태자(王太子)의 정성과 효성, 정리(情理)를 고려하여 폐서인(廢庶人) 민씨(閔氏) 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 하노라.” 하였다.

황후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고종에게 뜻을 전달하였던 것이고, 고종은 아들의 이러한 마음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실록의 내용은 순종이 도리를 알고 행하며,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이치와 논리에 맞는 글로 각 상황마다 행동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에비슨 박사의 기록만으로 순종에게 ‘지적장애’가 있었음을 단언(斷言) 하기는 어렵다. 다만, 순종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상당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았다. 1895년 ‘을미사 변’은 22세 나이의 왕세자가 겪기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의 계략에 의해 어머니 명성황후가 처참히 살해당하고 이것을 밝힐 수조차 없었던 치욕은 순종에게 잦은 혼절을 가져왔다. 또한 1898년 8월에 발생한 ‘김홍륙 독다(毒茶) 사건’은 순종에게 치명적이었다. 이는 1898년에 김홍륙(金鴻陸)이 고종을 시해할 목적으로 공홍식, 김종화를 시켜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약(아편)을 투입한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홍륙 독다사건 편.)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과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은 상황은 순종에게 정신적·육체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순종이 ‘지적장애’를 지니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육체적인 문제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순종의 ‘성기능 장애’에 대해 다음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자.

세자는 음위의 질환이 있었다. 혹은 타고난 고자라 하고 혹은 어릴 적에 궁녀가 그 양경을 빨아 한번 나온 후 수습이 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나이가 좀 들자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될 때가 없었고 소변이 저절로 흘러 항상 자리를 적셨으며 하루에 한 번 요를 갈았으며 바지를 두 번 갈아입혀야 했다. 혼례를 치르고 해가 지나도록 남자 구실을 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한탄하며 몹시 조급해했다.

한번은 궁비를 시켜 세자에게 남녀가 교접하는 형상을 짓도록 하고 문밖에서 큰소리로 “되느냐, 안 되느냐?” 물으니, “안 됩니다.” 하였다. 명성황후는 여러 번 한 숨을 쉬고 가슴을 치며 일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완화군(完和君)을 살해한 응보라 생각하였다.(황현 저, 임형택 역(2005), 『매천야록』 상(上), 문학과 지성사, 292면.)

이는 황현(黃玹)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서술한 비사인 『매천 야록』에서 세자의 성질환을 다룬 대목이다. 『매천야록』은 세자였던 순종이 발기 장애로 인해 성기능에 장애를 지녔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에비슨 박사가 순종을 ‘성적(性的) 으로 미발달된 상태’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실록에 따르면 순종은 고종 19년(1882) 여흥 민씨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별히 내렸다.

왕태자였던 순종은 모친인 명성(순명효황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고, 고종 44년(1907) 해평 윤씨(순정효황후)를 황태자비로 맞이했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이것은 공통적으로 순종에게 ‘성기능 장애’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세자가 이미 남자 구실을 못한 나머지 고질이 되고 말았다. 명성황후는 세자에게서 후계자를 바랄 수 없음을 탄식하여 왕자 이강(李堈)이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가 그 아들로 세자의 계통을 잇게 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강을 대하는 것이 점차 박절하게 하지 않으니 완화군을 대할 때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신묘년(1891) 겨울에 이르러 임금에게 이강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하도록 권하였다.(황현 저, 임형택 역(2005), 같은 책, 293면.)

두 명의 왕비와 혼인하였음에도 후사가 없었던 탓에 배다른 동생인 영친왕 이은이 순종의 뒤를 잇는 황태자가 되었다. 이 또한 순종에게 ‘성기능 장애’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모두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남겨진 기록이다. 황현은 1910년 8월 강제 합병 직후 자결을 한 인물이다.

황현은 일본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조정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명성황후의 욕심 때문에 순종에게 후사가 없다고 한 기록은 명성황후의 과잉보호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황현이 왕실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악의적인 면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순종에게 자손이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진실이기에 그에게 성적인 장애가 있었을 가능성을 남긴다. 따라서 순종의 ‘성기능 장애’는 더 자세한 사료적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망국의 한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왕, 순종은 1926년 53세로 승하하였다. 순종은 1907년 부터 1910년까지 약 4년 동안 조선의 왕좌에 있었다. 그러나 4년의 시간은 순종에게도 조선에 게도 치욕적인 시간이었다.

무력을 동원한 일본에 의해 조선의 국력은 억압받기 시작했고, 송병준·이완용 등의 친일매국을 일삼는 정치인들에 의해 조선 정치는 통한의 시간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순종에게 ‘허위(虛位)의 황제’라는 낙인을 남겼다.

그는 황제였으나 황제의 삶을 살지 못한 군주였다. 그리고 빈껍데기와 같은 자신의 위치를 책망하며 짧은 재위 기간을 남겼다. 백성의 편에 서고 싶었으나, ‘친일파’를 앞세운 일제의 횡포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로 쓸쓸히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장애’에 대한 기록도 치욕의 역사와 함께 아직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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