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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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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장애인예술을 이끌어온 예술인을 만나다
프리다 칼로

이름, 직업, 장애 정보
이름 프리다 칼로
직업 화가
장애 소아마비

페미니즘 화가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1907-1954)는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는 평범한 사진사였으며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프리다 칼로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유모의 도움으로 자랐다.

1913년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약해지는 장애가 생겼고, 이 때문에 내성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이 되었다. 1921년 의사가 되기 위해 국립예비학교에 다녔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러시아 혁명에 심취하여 평생 공산주의 옹호론자가 되었다. 이때 학교의 벽면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목격하고 심리적인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리베라는 유럽에서 돌아와 멕시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유명한 예술가로 칼로는 그의 작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흠모하게 되었다. 칼로는 리베라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29년 연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 프리다는 리베라를 내조하느라 자신의 작품을 그릴 여유가 없었다.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이었지만 결혼 이후에는 남편 리베라와 함께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으며 멕시코 공산당에서 탈퇴하였다.

1930년 벽화제작을 의뢰받은 리베라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미국에서 프리다는 리베라의 그늘에 가려 항상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33년 록펠러재단의 의뢰를 받고 벽화를 제작하던 중 레닌의 얼굴을 그려넣을 것을 두고 재단측과 불화로 벽화제작이 취소되었고 마침내 고향 멕시코로 돌아왔다.

멕시코에 돌아온 후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리베라의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여자관계는 급기야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고 말았다. 프리다 칼로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냈으며 이 당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몇 개의 작은 상처들》이 남아 있다.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실망과 배신 그리고 분노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해 유럽에서 멕시코로 돌아와 같은 해 11월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했다. 잠시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진가 니콜라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여지만 그녀에게 리베라는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였다. 1940년 8월 프리다는 디에고와 다시 결혼을 하였는데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여 합의하였다.

프리다의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남편 리베라 때문에 겪게 된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점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선천적인 골반기형 때문이었고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 《나의 탄생》, 《프리다와 유산》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상처받은 사슴》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이후 프리다는 회저병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골수이식 수술 중 세균에 감염되어 여러 차례 재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1953년 프리다 기념전이 열렸으며, 1954년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마르크스와 스탈린을 추앙하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해 7월 2일 디에고와 함께 미국의 간섭을 반대하는 과테말라 집회에도 참가하였다가 7월 13일 폐렴이 재발하여 사망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는 글을 남겼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