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
회원메뉴 바로가기 네비게이션 바로가기 분문 바로가기

장애예술인

HOME > E 사람 > 장애예술인

[대중예술] 김민

이름, 직업, 장애 정보
이름 김민
직업 개그맨
장애 시각장애

 

김민

-직 업: 개그맨

-장 애: 시각장애

 

<활동분야>

  • 개그
  • 공연
  • 기쁜 우리 공동체 늘 푸른 샘 (회장)

 

<주요경력>

  • 980 TBC 동양방송 공채 개그맨 2기
  • 2001 기쁜우리 공동체 늘 푸른샘 창단
  • 2010 경남대 경영대학원 특강
  • ‘동방예의지국 경로 孝 큰잔치’ 기획 및 진행

 

 

<수상경력>

  • 2004 사)대한노인회 서울특별시연합회 표창장
  • 2007 성북구청장 표창장
  • 2008 청운양로원 표창장
  • 2009 나눔의 샘 감사장

 

김민은 당뇨 합병증에 따른 후유증으로 실명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1980년 TBC 동양방송 공채 개그맨 2기로 데뷔하였으며 동기로는 김형곤, 장두석, 이성미, 조정현 등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끼가 많아 군 복무중에도 문선대 소속으로 약 400여 회의 공연을 한 경험이 있다.

제대 후 라디오 전축을 통해 우연히 개그맨 선발대회 모집안내 방송을 들은 그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TBC 동양방송으로 달려가 접수를 한 그는 본선에서 3등을 수상하여 공채 개그맨이 되었다. 대부분이 초대졸이나 대졸이었던 상황에 혼자 유일한 고졸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데뷔하자마자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으며 승승장구하였지만 11월에 언론통폐합으로 동양방송이 한국방송에 흡수되며 일거리를 더 이상 찾지 못하게 되었다. 방송 스케쥴이 간혹 있었지만 당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그에게 방송 출연료로는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야간업소와 밤무대를 오가며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동기들은 방송을 하며 인지도와 지명도를 점점 높여갔고 그는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지만 대중에게는 점점 잊혀져갔다.

2001년 그는 의사로부터 당뇨진단을 받게 되는데 이미 합병증으로 인해 녹내장과 백내장이 동시에 진행되어 시력을 잃을 위기였다. 수술도 소용없어 약만 처방 받고 병원을 나와 거닐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종묘공원서 어르신들을 발견한 그는 슈퍼에서 박하사탕 세 봉지를 사서 나눠드리며 성대모사를 했다. 그는 가수 고복수의 친조카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 성대모사라는 것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타향살이’ 등 노래를 무반주로 부르며 성대모사를 하였고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대학가요제 출신인 김호평, 전자오르간 단장 강길성과 함께 ‘늘 푸른샘’이라는 자원봉사단체를 만들어 한 달에 두 번씩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청운양로원>과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나눔의 샘> 양로원을 방문하여 노인들이 즐겨먹는 과자나 빵, 생필품 등을 제공하며 지금까지도 꾸준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어르신들 사이에서 ‘아들 3형제’로 불릴 정도로 부모와 아들처럼 지내지만 결코 공연을 대충하지 않는다. 자신을 ‘공연하는 자원봉사자’라 말하는 그에게 봉사란 그야말로 받들어 섬긴다는 뜻 자체이다.

그는 매년 10월 2일 노인의 날에 장충체육관을 빌려서 <동방예의지국 경로 孝 큰잔치>를 하고 있다. 대한노인중앙회가 주관하고 기쁜우리 공동체 늘푸른샘과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서울특별시연합회가 주최하는 규모가 큰 공연인데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는 것이 당장의 목표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람은 남북 노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효도잔치를 개최하는 것이다.

“2012년 쯤 남북 어르신 각각 1500명씩 3000명을 한자리에 모시고 한바탕 신나는 경로잔치를 벌이고 싶습니다. 장소가 서울이든 평양이든 가는 방법도 500명씩 조를 이루어 땅길과 바닷길과 하늘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으로 공연 내용도 대중가수는 5%정도만 부르고 민족문화적인 것 위주로 하고 싶습니다. 엔딩도 생각해 두었는데 역시 사물놀이가 좋고요. 공연 타이틀도 ‘한민족 대동제 얼쑤 아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통일이지 않나싶습니다.”

그에게 개그는 오래된 장마처럼 깊이가 있어야 하며 웃음 뒤에 긴 여운이 남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도 그렇게 살다 가고픈 바람이 있는 그는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평생 어르신들을 모시며 그 분들의 웃음을 마음으로 보고 느끼며 살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