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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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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김동현

이름, 직업, 장애 정보
이름 김동현
직업 교수
장애 지체장애

 

김동현

 

-직 업: 교수

-장 애: 지체장애

-이 메 일: msisev@hanmail.net

 

<활동분야>

  • 성악(Tenor)
  • 대학 강의

 

<학력>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 수학
  • 독일 국립 쾰른음악대학 대학원 졸업

 

 

<주요경력>

  • 독일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단 단원 역임
  • 성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교수
  • 한국독일가곡연구회, 서울예술가곡연구회, 성음회, 우리가곡연구회원
  • 남서울교회(당회장:이철 목사) 호산나 성가대 지휘자
  • 뷰티플마인드 뮤직아카데미 교사 외.

 

 

<연주경력>

  • 슈베르트 Die scho ne Mullerin 전곡 연주
  • La Boheme, Faust, Martha 등 주요 오페라 50여 편 출연
  •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를린 징 아카데미 초청 <메시아> 협연
  • 루블리아나 방송교향악단 초청 <말러 8번 교향곡> 협연
  • 슈베린 국립가극장 초청 <베토벤 9번 교향곡><헨델 체칠리언오데>협연
  • 본 바하 합창단 초청 <미사 솔렘니스><엘리야><메사디 글로리아><천지창조>협연
  • 본 바로크 페스티벌 출연
  •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복음기자><바흐 칸타타> <베토벤, 모차르트, 푸치니, 비발디, 드보아 미사곡><성가연주회>
  • 독일가곡연구회, 서울예술가곡연구회, 우리가곡연구회, 성음회 등
  • 연구단체의 정기연주회, 기획연주회 출연
  • 2010년 독주회 (금호아트홀) 외.

 

1963년 여름, 태어난 지 10개월의 갓난 아기였던 김동현은 벽에 세워두었던 미닫이 문이 넘어지는 사고로 오른쪽 어깨가 눌려 이후 오른팔을 올릴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묘한 근성같은 것이 있었다. 위험하니 자전거나 스케이트같은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어졌고 자전거도 스케이트도 결국 마스터해 버리고는 했다. 좋아하는 것은 꼭 배우고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상당한 토대가 되는 부분이다.

모태 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고 고교시절 합창반을 지도해 주신 김명엽 선생님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음대 성악과에 진학하려면 노래 외에 피아노 연주도 기본으로 할 줄 알아야 했는데 오른팔이 올라가지 않는 장애를 가졌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을 이용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보았고 고3 시절 피아노를 기초부터 배우고 연습하며 음대 입시를 준비한 결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1981년 3월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음악가로서의 삶에 초석을 다졌다는 기쁨에 학교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였다. 하지만 교회음악에서 필수인 ‘지휘’를 할 수 없어 중도에 포기하고 독일로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독일은 모든 대학이 국립이고 외국인에게도 학비를 받지 않아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당시 시험 준비로 을지로 입구 학원 새벽반을 다니며 독일문화원에서 독일어 강좌를 듣고 노래 연습도 밤낮 없이 하는 나날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쾰른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을 목표로 본격적인 준비를 하였는데 경쟁률은 40대 1이었다. 그가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연습 또 연습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고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만인 1988년 봄 마침내 쾰른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92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오페라 단원이 되고자 오디션을 준비했다. 독일 오페라단의 오디션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유는 경쟁률에 상관없이 오페라단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한 목소리를 찾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최선을 다하였지만 함부르크와 슈트트가르트에서 각각 한 번씩 낙방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베를린 오디션에 합격하였다. 그의 목소리가 오페라단이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목소리로 선택된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을 가진 듯 그는 정말 기뻤다. 어린 시절부터의 소원이 노래하는 것과 직장을 갖는 것 두 가지였는데 동시에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페라단에 들어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외국인이나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평등이나 불편함을 겪은 일은 없다. 오히려 팔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 년에 받을 수 있는 휴일이 7주에서 8주로 늘어났고 각종 세금혜택에다 팔에 무리가 올 만한 일들은 거절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는 등 장애인을 배려하는 독일 사회 시스템의 혜택을 확인하였다.

6년 동안 오페라단에서 활동한 후 1998년 귀국한 그는 현재 성결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독일 국립 오페라단원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활동 자체만으로도 큰 명예이며 그만큼 경제적인 보상도 뒤따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뒤로하고 그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와 그동안의 경험을 조국에서 후배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후배들이 조금 더 넒은 꿈을 꿀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06년부터는 이희아, 박마루 등과 함께 자원봉사로 ‘희망으로 콘서트’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하며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