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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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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안태성

이름, 직업, 장애 정보
이름 안태성
직업 화가, 만화가
장애 청각장애

-이 름: 안태성

-직 업: 화가, 만화가

-장 애: 청각장애

 

 

<활동분야>

•동양화

•만화창작 외

 

 

<학력>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주요경력>

•전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학과 조교수

•전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학과 초대 학과장

•장애와인권예술인연대-도와지(圖와知) ; 장애아동,청소년 문화예술교육(2008~) 외

 

•한국장애인인권상 인권 실천 부문(2010) 외

 

 

 

나의 전직은 교수였다. 현재는 이름뿐인 화가이자 실업자지만, 긍정적 의미에서 프리랜서라고 소개한다.

 

대부분의 순수회화과 출신들은 졸업하자마자 백수가 되는데, 남 앞에서는 자신들을 이렇게 미화하여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나도 생계에 허덕이는 백수임에 틀림없다.

 

교수직에서 해직된 후 지난 7여년은 악몽이었다. 특히 5년간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글을 써도 혼란했고, 내용마저 반복과 중복을 오갔으며,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거나 잠을 자다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려다 불어오는 찬바람에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차라리 지구를 탈출하자는 극단적인 생각도 가끔 했다. 마트에서 제일 싸고 독한 고량주를 일주일에 두세 병씩 마시며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5년간 반복하기도 했다.

 

7년이 지난 지금 모두 체념하고 나니 한결 나아졌지만, 간혹 울분에 휩싸이거나, 대성통곡한 뒤처럼 가슴이 먹먹하며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로 답답할 때가 종종 있다. 종교는 전혀 믿지 않지만 이 때만은 “관세음보살” 따위의 불교 진언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월이 조금씩 약이 된 건지 모르지만, 윤회론에 의지하여 전생에 내 업장이러니 하는 자조섞인 체념이 지난 시간에 대한 달관을 가능하게 한 모양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별명도 가는 귀 먹은 ‘귀먹쟁이’였는데, 40여년 전 과거에는 차별하겠다는 의미보다 일종의 별칭으로 종종 불리기도 했다. “뒷집 왕대포” “앞집 귀먹쟁이” 등으로.

 

그러나 나에게는 항상 목소리 톤을 높여 말하기도 했는데, 문화와 교육수준이 높아진 지금은 뻔히 알면서도 큰소리로 말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차별’이란 단어조차 듣기 어려웠던 과거의 수준이 더 높았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목 양편에는 구멍이 뚫려 탁구공만한 멍울이 부풀었다 줄었다 하며 배냇냄새 나는 투명한 액체를 밤낮없이 배출하는 통에 항상 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녔고, 가슴은 삐뚤어져 비정상이었다. 20세를 못 넘기고 죽을 팔자라고 수군거렸다. 지금도 사람들은 목의 구멍 난 흔적을 유심히 구경한다.

 

이 때문인지 농촌에서 태어난 나는 흙 마당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았다. 청각장애인에게 종종 발달하는 반대급부적인 시각적 기능이 후두엽과 소뇌의 촉진을 강하게 한 탓인지, 나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림들을 홀로 배워나갔다. 초, 중학 때는 물감 살 돈이 없어 반 동무들의 그림을 그려주고 ‘수’를 독차지했다.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공고를 들어갔으며 공장에 출근하는 ‘공돌이’가 되었다. 공장에서는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놈이라고 가끔 코피 터지게 얻어맞았다. 그러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물론 초, 중학 때는 말을 더듬거나 잘 하지 못해 선생들에게 인격모독을 포함, ‘뒈지게’ 맞거나 벌을 선 적도 많다.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이 당시 선생님들 이름까지 아직도 기억한다.

 

음악 시간에는 선생과 학생들이 내가 부르는 더듬거리는 노래를 듣고 배꼽을 잡으며 뒤집어지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감정까지 섞어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에겐 꽤나 진귀한 시조였고, 웃음꺼리였던 모양이다. 너무 웃어 눈물이 맺힌 음악 선생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런 와중에 홀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성대를 틔우기 위해 산이나 들판에서, 또는 논길을 홀로 걸어가며 큰소리로 낭독을 자주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말소리를 제대로 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자화자찬을 한다면,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서를 해나갔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 須讀 五車書)라는 말을 실현하겠다는 각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돈이 없어 거의 모두 빌려보았는데 쇼펜하우어의 염세나 게오르규의 25시가 가슴을 쳤다. 내 처지와 뭔지 모르게 비슷했던 모양이다.

 

수많은 독서 역시 나중에 대학입시나 미술이론에 큰 도움이 되었고, 교수나 동료 앞에서 잘난 체(?)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공장을 그만 둔 후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 들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졸업했다. 마음씨 좋고 돈 좀 적당히 있을 법한 처자를 관상학적 본능에 따라 꼬드겨 결혼도 했다.

 

그러나 대학이나 대학원 생활 동안 교수의 가르침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위 동료들에게 물어 보거나 뭘 하는지 살펴 본 후에 그림을 그렸다. 교수가 가끔 와서 그림에 대한 지적을 해줘도 무슨 말인지 몰라 교수가 자리를 뜬 후 학생들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남의 일인지라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다.

 

한 번은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학생들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세워놓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조용하고 장엄하게 말씀을 하셨다. 표정을 보아하니 언짢은 모양이었고 거부의사를 밝히는 중이라 짐작했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한 동료학생에게 무슨 말인지를 물으니 저번에 한 선배가 주례를 부탁해서 친히 나섰는데 홀대받아 이번부터는 주례를 안 서주기로 했다는 말씀이라고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이런 저런 연유로 나는 미술 공부를 혼자서 해 나갔다. 모르면 책을 찾아봤고, 전시장을 돌며 그림들을 자세히 관찰했으며, 감시원(?)이 안 볼 때를 틈타 손가락으로 물감의 흔적들을 만져보거나 액자의 좌우 측면에서 독수리의 눈으로 이리저리 세심하게 살펴본 후 좁은 방구석에서 재현해보기도 했다.

 

물론 만화도 휴학과 졸업 후에 계속 했는데 역시 독학이었고, 돈이 전혀 되지 않는 그림대신 생계에 가끔 보탬이 되었다. 따라서 스승은 나 자신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중앙, 동아 미술제 등 유명 전람회에서 10여 차례 넘게 입선을 했는데, 모두 좁은 방구석에서 벽에 종이를 붙이고 그렸고(동료들은 화판이나 액자를 맞춘 뒤 종이를 붙여 이동이 편한 자세로 그렸다), 한국에서 매우 잘나가는 유명대학이었기 때문에 심사위원으로 자주 들어가는 교수님들에게는 보여준 적도 없었다.

 

물론 나에게도 정보를 주었다면 부리나케 달려가 보여드리고 입상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런 도움 없이 곧잘 입선되는 나에게 동료 학생들은 ‘입선 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였고, 교수가 없을 때는 내가 돌아다니며 지도 했다.(?) 한참 다른 학생들의 그림을 그려주다 번번이 교수에게 걸리기도 했지만 아무런 말씀 없이 묵묵히 구경하다 돌아서 나간 적이 많았다.

 

어쨌든, 무심결에 하는 사소한 이야기나 소문 따위를 들을 수 없던 청각이 고장 난 내게는 “어느 교수님께서 그림을 보러 오신다더라” “언제 몇 시까지 술집에서 모인다더라” 라는 작은 속삭임들이 얼마나 중요한 생활의 길잡이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어떤 소리는 들리고, 어떤 소리는 안 들리니 항상 심중에는 혼란이 일었고, 때로는 갈팡질팡 망설이다 홀로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예가 많아 차라리 아주 안 들려버렸으면 인생살이가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라는 자문자답도 자주했었다.

 

이 때문에 독불장군이니 사회성이 없다느니, 인적교류가 좁다느니 등의 욕은 당연히 따라왔던 모양이다.

 

잘 들리지 않아 “무슨 말인데?” 라고 물으면 “형님은 몰라도 돼요” 따위로 뭉개버리니 사회성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나는 늙은 학생이었다) 더구나 눈치까지 부족하여 교수나 선배로부터 엉뚱한 놈이라는 비아냥도 자주 들었다.

 

한번은 모 대학의 농인 대학생 특강에서 자신을 법대 학생이라고 밝힌 여학생이 “교수직에서 잘린 이유가 청각장애가 아니라, 사회성 탓에 그런 것 아니었냐?” 고 도발적으로 물은 적도 있을 만큼 필자는 한 눈에 딱 보기에도 사회성이 없어 보이는‘꼬락서니’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반응이나 대접은 교수가 된 후에도 여전했다. “귀가 먹었으니 교수질 그만 두고 집에 가서 그림이나 그리지?” 라는 폭언을 시작으로 왕따가 되었고 차별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내가 받은 응답들이 거의 모두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배제나 거부로 판단되어 좀 나아지긴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장애인 운동에 일생을 바친 운동가들과 관련 선각자들의 값진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지면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미술, 만화 등의 다양한 정보나 분석, 비평 글들은 장애인 문화에 일조가 되도록 빠짐없이, 좀 더 현실적으로 쓰고, 그리도록 하겠다.

 

하지만 일부를 제외한 전체 장애인들은 생존 자체만으로도 힘들어 예술이나 문화, 특히 순수회화 등에 거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지난 7여 년간 경험한 터라, 극히 소수의 관심 있는 분들에게나마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어차피 욕 먹고 두들겨 맞으며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살았던 인생이고, 이젠 잘 먹고 잘 살았던 교수도 아니니 점잖게 모양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지양하리라 생각한다.

 

뒤늦게 흔해 빠진 유행가 가락 같은 신세타령 한 번 했다.

 

(출처: 에이블뉴스 컬럼_‘어느 경계인의 도전과 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