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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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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예술] 김규인

이름, 직업, 장애 정보
이름 김규인
직업 배우
장애 지체장애

-이 름: 김규인

-직 업: 배우

-장 애: 지체장애

 

 

<활동분야>

•연극

 

 

<학력>

•서울예술대학교 졸업

 

 

<주요경력>

•연극 ‘동물원의 호박꽃(1972)’ 외

 

 

김규인(1952년생) 씨는 경남 진해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의 장손이었고 아버지까지 5대 독자였으나 그는 3남 2녀의 장남이라고 했다. 그처럼 뼈대 있는 집안에서 고향이 의창인데 왜 진해에 살았을까.

 

“아버지가 진해 해군 군무원이었습니다.”

그는 5남매의 장남이고 아래로 동생들이 줄을 이었기에 어렸을 때의 기억은 별로 없다고 했다.

 

“온 세상이 벚꽃 천지고 벚꽃 잎이 하얗게 날리는 속에서 아버지는 연극을 했습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진해 군항제가 열리고 아버지는 군항제에서 연극을 했는데 그는 군항제에서 연극하는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게 보이더란다.

‘나도 크면 아버지 같은 연극배우가 되어야지.’ 그 때가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연극배우로 분장한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크면서까지 연극하는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진해를 떠나서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군무원이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5남매가 커 갈수록 돈 들어갈 데가 더 많아져 아버지는 군무원을 그만두고 배를 탔다.

 

“아버지는 기관장으로 외항선을 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부산에서도 서너 번은 이사를 한 후에 가야에 집을 지었다.

 

“어머니가 새로 지은 집은 대궐 같았습니다.”

그동안 전세방을 전전하다가 정원도 있고 텃밭도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텃밭에다 오이랑 깻잎이랑 상추를 심어 가꾸셨고 그는 공부를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써서 초등학교 때는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어렸을 때는 연극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상이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진학을 생각하면서 연극배우를 결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는 딴따라라고 사회에서 천대하던 시절이라 부모님에게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께 연극배우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니가 정 하고 싶다면 잘해 보라고 하시대요.”

아버지도 알아서 하라며 반대하지 않았다. 담임선생은 연극을 하고 싶다면 서울연극학교를 가라고 했다.

그는 서울연극학교 입학을 위해서 서울 퇴계로에 있는 배우학원에서 1년간 재수를 했다. 배우학원에서 배우가 되기 위한 기본소양을 배우고 연기를 연습했다.

 

“배우학원은 학교에 갈려고 재수했다기보다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는데 제가 출연했던 팸플릿 1장은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며칠 후 김규인 씨가 필자에게 보여 준 것은 당시의 연극공연 팸플릿이었다. 극단 8월 제6회 공연작품으로 이근삼 작 석민 연출의 ‘동물원의 호박꽃’인데 1972년 3월 31일 오후 7시 한국일보소극장에서 공연 된 작품에 그가 출연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다음 해에 서울연극학교에 입학을 했다. (서울연극학교는 1958. 8.26 한국 현대연극의 선구자인 동랑 유치진 선생께서 민족극을 바로 세워 일으키기 위해 설립한 학교로 3년제 전문대학으로 남산에 있었으며, 현재는 서울예술대학교로 개명하여 안산에 있음. -필자 주)

학교는 남산에 있었고 그는 학교 인근인 금호동에서 자취를 했기에 학교까지는 걸어 다녔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지도교수로부터 늘 야단을 맞았다.

 

“배우학원에 다닐 때도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 때문에 쿠사리(일본어kusari, 핀잔) 많이 먹었습니다.”

선생들은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을 못 고치면 배우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죽어라고 노력했지만 20여년 동안 길들여진 경상도 사투리와 억양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영화진흥공사에 영화배우 캐스팅이 있었다. 남녀 배우 2명을 뽑는데 지원자는 3000명이 넘었다. 영화배우는 남녀 각 1명씩 2명을 뽑는데 1차는 서류심사, 2차는 연기테스트, 3차는 카메라 테스트 그리고 최종심사를 했다. 그도 지원했었고 운 좋게도 최종심사를 하는 남녀 20명 안에 들었다.

 

“최종심사는 전국에 생방송이 되었는데 후라이보이가 사회를 보고 김지미가 심사위원이었고, 송대관하고 정미조가 신인가수로 축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여로’를 하던 무렵이라던데 최종심사에서 그는 탈락했다. 굳이 떨어진 변을 하자면 군대를 안 갔다 와서인데 그는 육군영장을 받아 놓은 상태였기에 영화를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일로 인해 1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했다. 어린 시절 그가 뛰놀던 진해에서 보병훈련을 받았다.

 

“진해에서 13주 훈련 받고 32개월 복무했는데 요즘은 6주 훈련에다 21개월이랍니다.”

훈련을 시작하고 2~3주쯤 지나자 의장대와 헌병대에서 사람이 나왔다. 자기네들이 필요한 사람을 차출하기 위해서인데 그는 헌병대에 뽑혔다. 훈련이 끝나고 해군본부 해병대 사령부에서 한 달을 대기했다.

 

“그동안 밥하고 옷 다리고 정문 앞에서 보초를 썼는데 잘 못한다고 빳다도 많이 맞았습니다.”

한 달 후에 육군종합학교 헌병 기초반에서 8주 훈련을 받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포항헌병대였다. 형산강 검문소에 근무하면서 포항 ↔ 대구 열차 이동헌병대에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열차에서는 술 먹고 고성방가 하거나 복장을 제대로 안 갖추는 등 군기를 흩트리는 사람을 적발하고 그 대신 민간인으로부터 군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1975년 8월 15일 전역했다.

 

“2학기 복학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길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뇌출혈로 운명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을 때는 어머니의 소중함이나 존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어머니의 존재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한다지만 저에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몇날 며칠을 혼자 울었다.

 

“사실은 어머니의 죽음보다도 제 인생이 더 막막했습니다.”

그가 5남매의 장남이라도 모든 것은 어머니가 관장하시기에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고, 그가 연극배우가 되고자 했던 것도 어머니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의 지침 돌이자 등대였는데 이제는 아무리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들 한번 가신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실 리 만무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배를 내린 아버지가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야 했다. 복학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안 계셨기에 연극배우의 길은 멀어진 것 같았다. 아버지는 군무원을 하시다가 외항선을 타셨기에 세상물정을 잘 몰라 동생들도 그가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1년 후에 재혼을 하셨는데 그 대궐 같은 집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새어머니는 그 보다는 5살이 많은 여자였는데 아버지는 집을 팔고 새어머니와 다른 데로 이사를 했다. 어찌어찌 학교는 졸업했으나 배우의 길은 너무 멀었고 그는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합판공장에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데 그의 이력서를 보던 면접관 하는 말이 ‘날아다니는 새가 갇힌 새가 되려하느냐’고 했다. 어쨌거나 발령은 났지만 면접관의 말처럼 합판공장에 갇혀 지내자니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한 달도 채우지 못했다.

그에게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삼촌이 식당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와 같이 가끔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곤 했는데 삼촌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가 절망에 빠졌을 때 삼촌의 딸 즉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 그를 위로해 주기도 했었다.

그는 합판공장을 그만두고 혼자 여관에서 술독에 빠져서 울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사촌 여동생을 불렀는데 그가 불쌍해 보였는지 여관까지 와주었다. 사랑이었을까. 그는 꺼이꺼이 울었고 여자는 우는 그를 위로하며 달래 주었다.

 

“우리 달아나자”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 변00(57년생) 씨도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그를 따라 나셨다. 이를테면 식구들 몰래 도망 나온 야반도주였다. 친구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변00 씨를 데리고 마산으로 갔다.

 

“마산에서 방을 하나 잡아 놓고 아는 사람을 통해서 도서 세일즈맨으로 일했습니다.”

도서는 전집류와 아동도서를 취급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지만 세일즈에 소질이 있는지 실적이 좋았다. 처음 마산에서 도서 세일즈를 시작했는데 5~6개월이 지나자 출판사가 울산으로 이사를 간다 해서 그도 따라 갔다. 물론 집 나온 변00(57년생) 씨도 함께였다.

알고 보니 보통 도서외판을 하는 출판사는 한 곳에서 5~6개월을 넘기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이 관례였다. 그는 출판사를 따라 서울도 가고 제주도도 갔다. 출판사가 전국을 떠돌다보니 출판사 사무실도 여관이었고 그도 여관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내의 배가 불러 왔다.

혼인신고는 했지만 결혼식을 하고 애를 낳아야 되겠다 싶어서 아내의 집 즉 처가를 찾아갔다. 재산도 한 푼 없이 딴따라를 하던 놈이 어찌 우리 딸을 넘보느냐고 장인장모는 노발대발 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고 결혼승낙을 받기 위해 몇 번이나 더 처가를 찾아야 했다.

 

“장인장모 앞에서 절대로 마누라를 고생안시키겠다고 맹세 했습니다.”

장인장모도 마지못해 승낙은 했으나 이미 시간은 흘러서 결혼식도 못 한 채 아내는 첫 딸을 낳았다. 1981년도에 부산에서 결혼식을 하고 떠돌이 세일즈맨 생활을 청산했다. 부산에 정착하면서 ‘현대유통’이라는 의료기 임대업을 시작했는데 제법 장사가 잘 되었다.

아내는 둘째 아들을 낳았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딸은 공부도 잘했고 커서 탤런트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신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라고 했다. 딸이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용호동에 32평 아파트도 하나 샀고, 시간이 날 때면 딸과 딸의 친구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기도 해서 ‘00아빠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처음 아파트를 사고는 장인 장모를 초대해서 거나하게 대접하기도 해서 장인장모가 놀라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잘나가던 황금기였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 하나, 그의 황금기는 2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부산에 정착하면서 해병전우회에서 활동했는데 1997년 9월 25일 포항에서 해병전우회 모임이 있었다. 그는 해병전우회 마크가 그려진 봉고차를 몰고 갔는데 포항에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경주로 가는 길에 양동교 교각을 들이 받으면서 정신을 잃었다.

 

“밤 1시경에 사고가 난 모양인데 인적도 없는 비 내리던 밤의 깜깜한 다리 밑이라 3시경에야 발견이 되었답니다.”

경찰에서는 빗길에다 피로가 누적된 졸음운전으로 일어나 사고라고 했다. 발견당시 왼쪽 다리는 짓이겨지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에서 절단되었는데 그를 발견한 119에서는 잘린 다리를 병원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접합술은 세계 최고라고 들었지만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인지 그는 너무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의사는 잘려나간 다리는 보지도 않은 채 오른쪽 다리의 잘린 부분을 봉합해 버렸다. 의사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의식불명상태였다.

운전석에 앉았다 일어서기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외에는 별 문제없이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를 악물고 일을 했기에 늘 1등을 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제일 밉고 괘씸한 사람은 차비를 안 주고 달아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운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는 재빨리 일어나서 도망자를 쫓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금문제로 시비가 붙으면 처음에는 경찰서로 데려가 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돈도 못 받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한 번은 범일동에서 동래까지 간다는 50대 남자를 태웠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자는 농담처럼 그에게 물었기에 ‘돈이 없으면 택시를 안 타야지요.’라고 대답했다. 동래에 도착하자 남자는 돈이 없다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 남자를 잡으러 갈 수도 없고 멍하니 바라보는 해바라기 내 신세가 참 처량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장애인들과 차츰 알게 되고 지역단체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알고 보니 다른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득과 영달을 위한 것 같았다.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 5년 동안 일했던 E택시회사를 그만두고 장애인단체를 맡아보니 기존의 벽이 너무 높은 것 같았다. 아무 소득도 없으면서도 단체끼리의 통합이나 합동은 더 어려워 보였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다시 S택시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가 운전을 할 때는 보통 1차제를 했는데 아침부터 15시간 정도는 일을 해야 사납금을 맞추고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다시 택시 운전을 한 지 1년 쯤 지난 2011년 9월 30일 새벽, 일을 마치고 세차하고 집에 가서 아침밥을 먹은 뒤 금곡동에 있는 문화연수원에서 9시부터 실시하는 보수교육을 받고 12시 30분쯤에 일어나려니까 어지러웠다.

괜찮겠지 별걱정 없이 집에 오는 길에 볼일 보러 한군데 들렀는데 말이 어눌하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밤샘한 탓이라 싶어서 빨리 집으로 와서 일찍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을 나갔다. 손님이 그에게 뭐라고 해서 그가 대답을 했는데 손님은 그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물었고 그가 다시 대답을 하자 손님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말을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약간 어지럽고 말이 잘 안 되는 것 외에는 죽을병도 아니었기에 월요일인 10월 3일에 스쿠터를 타고 근처 한의원으로 갔더니 그를 진맥한 한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병이 얼마나 심각하지 몰랐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동의의료원으로 갔는데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그는 왜 입원까지 해야 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의사는 ‘꼭 죽을병에 걸려야 입원 하느냐면서 당장 입원하고 MRI를 찍으라고 했다. MRI결과는 뇌혈관이 두 군데나 막혀있는 뇌경색이었다. 필자가 그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말이 약간 어눌했었다. 그 때 온 뇌경색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는데 일을 못한 것은 고사하고 입원비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요양급여신청을 했는데 1주일을 기다려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는 입원비가 부담이 되니 요양급여승인이 날 때까지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말하고 퇴원했다.

두 달 후에 근로복지공단에서 회신이 오기를 요양급여는 불가하다고 했다. 그의 뇌경색은 고혈압과 당뇨로 인한 평소의 지병이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재판을 청구했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다 했더니 법원에서 국선변호사를 선임해 주데요.”

1심에서는 승소했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 항소하여 재판 중이란다. 이번 재판에서도 이기겠지만 근로자를 위해서 설립 된 공단이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 주어야지 누구를 대변하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했다.

그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의 고향인 경남 의창군 동읍에 가족묘가 있기는 한데 남의 땅에 묘를 쓴 거라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몇 해 전 의창군에서 연락이 왔었다.

 

“군에서 ‘우리 땅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의창군 동읍 고향에 우리 땅 240평이 있다는 겁니다.”

성산김씨(商山金氏)의 가족묘가 우리 땅이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가족묘에도 할아버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를 썼다. 그의 할아버지 김병호(김秉灝)는 1906년생으로 만주 봉화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데 자료가 부족하다하여 아직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못 받고 있단다. 봉화에 있다는 할아버지의 묘소도 한번 찾아보고 꼭 독립유공자로 지정받고 싶단다.

또 하나는 그의 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K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오기는 했지만 현재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장애인예술단체라도 설립해서 못다 핀 꽃한송이라도 가꾸고 싶단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연극배우였는데 장애인이 되고서여 다시금 그 꿈을 뒤돌아 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소송이다 뭐다 해서 복잡한 상황이지만 여유가 되면 배우의 꿈을 가진 장애인들에게 그 꿈을 꼭 실현시켜 주고 싶단다. (출처 : 에이블뉴스_‘지체장애 2급 김규인 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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