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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한관식 조회수:2015 220.94.91.30
2019-04-14 16:27:35

자전거

   한관식

 

 전화를 받았다. 단지 만나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전화를 했기에 필히 「손님」으로 늦어도 네 시까지 도착해 있어야 된다는 다분히 도전적인 명령을 끝으로 이미 수화기를 놓은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다섯 번째 뚜 소리를 듣고서야 모범생처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저 장난 전화로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네 시까지는 두 시간쯤 남아 있기에 그 때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하사관으로 있는 병구를 향하여 펜을 들었다.

병구

 시인 천상병을 기억하자. 한때 도서관에 근무하던 아가씨를 사랑했단다. 그러나 늘 그랬듯 말 한 마디 못하고 주위를 맴돌면서 서울대 상대를 다니던 시절, 거의 독파해 버린 도서관을 아가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앞에 놓인 책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놓아둔 채 얼굴 훔쳐보기에 전념하였단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의 부재중으로 텅 비어버린 도서관에서 빠져나와 그 아가씨가 갔다는 외갓집의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단다. 내일 출근한다고 이야기 했으니, 그렇다면 이 길을 지나쳐 갈 것이다. 시인은 다리목에서 자리를 잡고 아가씨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둠의 속살을 벗겨내는 가로등이 켜지고 그래도 그 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때 문득 버스 한 대가 다리 저쪽에서 이쪽으로 지나쳐 갔다. 아, 버스를 탈 수 있겠구나. 그렇다면 이 기다림은 무의미하구나.

 한 때는 시인의 몰입을 미치도록 닮고 싶었다. 얼마나 아가씨를 생각했으면, 찾으려고 노력했으면 여섯 시간이 지나고도 그토록 많은 버스가 다녔는데 그제야 한 대를 발견했겠는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저리도록 부러웠다. 네가 문득 지나쳤던 어느 이웃집, 착한 아내의 정성으로 만든 된장국 주위에 둘러앉았던 사람들, 저녁이 있는 풍경, 잠자리에 드는 사람과 역사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청포도가 익어 한번쯤 파란 아침이 찾아오는 날, 창문을 열어 보라. 아침 햇살이 파랗게 부서져 내리면서 몽상의 봇짐을 실은 나귀 한 마리 들어오리라. 훗날 너를 닮은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봇짐을 풀어 소망의 언덕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 주시게. 자, 그러면 안녕.

 편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했다. 쉼 없이 흐르고 있는 물결 안에서 나도 한줄기의 물결이 되었다. 빨간 우체통을 찾는 가난한 물결처럼 저 물결의 끝은 어둠의 어디쯤일 것이다. 깃털을 접고 틈틈이 마련해 놓은 보금자리를 찾아 일상의 그늘 속에 파묻힐 것이다. 고만고만한 삶으로 어쩌면 보상 받게 될 피곤의 부피와 때로 튕겨져 나가고 싶지만 약속되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버팀목들. 그러나 물질의 잣대로 선을 그어놓고 이미 서로의 무리를 지어 어울려 사는 군상이면서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만약 붕어빵처럼 틀에 의해서 똑같이 찍혀져 나왔다면 삶이란 단순하고 무의미하고 차라리 무력해질 건데 메기 빵도 있고 쏘가리 빵도 있으니 이 얼마나 살맛나는가. 낄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체통에 도착할 때까지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물결에서 이탈한 몇 사람은 전염된 웃음을 흘리면서 나를 쳐다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별의별 개떡 같은 놈도 있다는 식의 표정을 얼굴 가득 지으면서. 그러나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살 맛 난다고, 역시 세상은 쫄깃쫄깃 하다고.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시간을 봤다.

두시 오십분. 지금 무엇 때문에 시간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네 시라는 자유롭지 못한 구속의 덫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튼튼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파란불이 켜지자 이마와 목덜미에 간지럼 먹히던 늦여름의 햇살을 털어내며 저쪽과 이쪽의 사람들은 길만 바꾼 채 다시 물결을 이루었다.「손님」에 나갈 것인가 나가지 않을 것인가는 이미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나를 떠난 발걸음은 정확하게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삐거덕 거리는 목조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수줍은 듯이 나직하게 대나무로 엮어 만든 검은색 출입문을 만난다. 어디에서 나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아카시아 꽃향기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러다가 문을 열면 베토벤과 결혼했다는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때로 테이블을 오가며 차를 나르기도 하고, 뮤직 박스 안에서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려놓기 위해 비닐종이처럼 양미간을 구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베토벤의 운명처럼 흥건히 엎질러진 은빛 음악에 스스로 잠수를 택하지 않으면 베토벤에게 익사하게 된다. 나는 항상 익사의 떨림을 택해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찾아와 항시 열려있는 청각을 훔치고 종내에는 목젖을 누르면서 마지막까지 숨통을 죄여 온다. 그 황홀한 공간에서 진정한 손님으로 남기 위한 자격은 스스로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시 삼십분 어느새 「손님」앞에 다다라 있었다.

흐린 하늘을 보고 있다가 목조의 첫째 계단을 밟았다. 그 감촉이 또르르 굴러 오는 오색 구슬 같았다. 둘째 계단 셋째 계단…… 계단은 그 전처럼 아홉 개였다. 그러나 많이 옅어진 아카시아 향기로 조금은 실망되었다. 모이 찾기에 급급하여 거의 이년 동안 비워 두었던 문을 미안한 듯 가만히 열었다. 아, 베토벤은 떠나고 없었다. 뮤직 박스 안의 베토벤 마누라도 없었다. 테이블 사이로 상큼상큼 걸어 다니면서 추억처럼 웃음을 실어 보내던, 그래서 취한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블랙커피만을 고집하게 했던 베토벤 마누라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뮤직 박스는 커텐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구의 종말과 같이 하게 될 베토벤 대신에 FM방송으로 바꿔 놓았다. 그 무서운 변화는 두렵기까지 했다. 「손님」의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종업원처럼 보이는 아가씨가 칠십대 노인 옆자리에 앉아 팔을 주물러 주면서 갖은 아양으로 양념을 치고 있었다. 노인은 팔 한쪽에 전해지는 교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주방 아줌마에게까지 이미 쌍화차가 전달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아가씨는 노인과 자신의 관계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시위라도 하듯 일수 돈을 받으러 온 아줌마에게까지 쌍화차를 시켜주고 있었다. 거의 무표정한 노인을 버려둔 채. 갑자기 난감해졌다. 손님이 아닌 손 놈의 분위기 안에서 더 이상 앉아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때 문이 열렸다. 카운터 위에 걸려있는 시계가 네 시를 가리켰다. 한 여자가 들어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주저하지 않고 내 앞에 멈췄다.

“지석훈씨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앞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둘 곳을 몰라 엽차를 소리 나게 후루룩 마셨다. 확증을 잡은 형사처럼 여자는 당당했고, 꽁무니를 감추고 낑낑대는 자신의 모습에 갑자기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한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여자가 얼굴 가득 웃음기를 털어 내지 않고 앉으라고 했다.

“제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솔직히 일어났지만 「손님」을 나갈 자신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느냐는 여자의 말에 마지못해 앉는 표정을 지으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 몫의 엽차를 가져다 놓기 위해 다가왔던 종업원은 돌연한 나의 태도에 사뭇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느 정도 수습된 모습 앞에서 엽차를 올려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엉겁결에 커피라고 이야기했고 여자는 예의 웃음을 머금은 채 같은 것으로 주문하면서 엽차 잔을 자신 앞에 당겨 놓았다. 커피는 고맙게도 빨리 도착했다. 티스푼을 잡은 채 그제야 여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얼핏 베토벤 마누라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래서 본 듯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이 집 커피 맛이 어때요?”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내 몽상을 깨트려 놓았다.

“예전 손님이 아니듯 커피 맛도 아닙니다.”

“여전하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때?

“저 모르겠어요. 은영이에요.”

내 멱살을 불끈 쥐고 한 순간에 오년 전의 과거로 충분히 돌려보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이렇게 수줍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오년의 세월은, 그 오년의 세월에 무엇을 하며 살아 왔던가. 삶의 행로에 궤적을 채우며 아직도 터널을 벗어나지 못한 꼴로 앉아 있는 것이 나라면,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거칠 것 없이 소망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면서 세상을 일구어 온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것도 오년 전에 여드름이 나면 자살하겠다던 은영이가.

그 겨울, 나는 소위 말하는 연애편지 한 통을 공책에 찔러 넣고 지하철을 탔다. 대학 4학년인 내가 취직이다 뭐다하는 잡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생활을 무시한 채 걷잡을 수 없이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니는 학교에 재직하는 교수였는데 나는 그녀의 부와 명성만 송두리째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을 알아냈고 마침내 찾아가고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그녀는 이 편지를 받아 쥐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장난기에서 출발했지만 그 생각이 집요하게 가슴을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결론을 지었다. 그렇게 복잡하던 지하철이 신도림역에서 여유가 생겼다. 출입구에 기대어 한심한 나를 탓하면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로 자위하며, 교수의 집을 향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운명이라고 스스로 어깨까지 툭툭 쳐주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고생들이 킥킥 거렸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을 수 있는 나이다 생각하고 개의치하지 않았다. 부평역에 내려서 챙겨온 약도를 보며 이 골목 저 골목 뒤져서 겨우 그녀의 집 앞까지 당도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다행히 그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꾸벅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역력한 채 나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책갈피 속에 끼워 둔 편지를 찾았다. 여차하면 악 소리를 지를 것 같은 그녀를 남겨둔 채. 없었다. 편지는커녕 개나발도 없었다. 침착하게 다시 한 번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섰다. 기회는 또 있으니까. 이번에는 길거리에서 내가 악악 소리를 질렀다. 고쳐 쓰고 고쳐 쓴, 백 번도 더 읽어 보았을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내 몫의 시간이여. 따뜻한 둥지여. 지나쳐 왔던 내 울타리 속의 모든 추억을 그리워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당신을 기다리나니, 내 의미의 시작이자 끝인 당신의 가슴에 지금 분주히 다가가고픈 고적한 외로움으로.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면서 전철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다소곳한 여고생이 흰 칼라의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혹시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용무가 있지 않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여고생은 정확히 걸어왔다.

“이 편지를 찾으셨죠?”

은영이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지의 뒷부분은, 백화점이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의자에서 은영이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언젠가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어질 흐름을 기다리고 있는 에드발룬 같은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고 난 우리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웃음이라선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은영인 무슨 생각으로 내 뒤를 밟았지?”

“사실 내가 이 편지를 주운 것이 아니라 친구가 주웠어요. 난 다만 만원에 편지를 가질 수 있었고, 주인으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오빠를 따라붙었죠. 끝까지 지켜보자는 내 호기심을 데리고 다니느라 혼났어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대학교 사학년으로서 압박감을, 서로 느낄 수 없다는 동질감으로 그 후 몇 번 만났다. 은영이의 가족은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수속이 끝나 한 달 뒤 독일의 아헨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헨에서 지렁이를 잡아서라도 정착한다는 것이다. 그런 각오로 이 땅에서 발붙이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건데 굳이 이민을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은영이는 결정권이 없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려 또 다른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은영이 아버지가 이 땅을 등지는 이유였다. 아헨 고등학교까지 정해져 은영이의 선택과는 이미 무관했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수십 명의 수재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일류 대학을 다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망설임 없이 털어놓는, 담백한 은영이는 정말 한 달 뒤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떠나갔다. 그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굳이 은영이에게 의미를 찾는다면, 극장에서 손을 잡고 영화를 보면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섹스에 대한 유혹이었다. 간간히 팔꿈치쯤으로 전달되어지는 젖가슴과,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온 몸에 화장품을 엷게 바른다는 그 말에 정신이 아찔해지곤 했다. 그러나 도덕적인 면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조랑말에 싣고 떠나가는 여자에게 이 땅의 한 남자가 줄 수 있는 것은 빛보다 고운 순결이었는지 모른다. 떠나기 전날 밤, 그녀는 깊은 입맞춤을 선물했다. 나는 보랏빛 만년필을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은영이의 팥 빛 자궁을 틀림없이 확인하겠다고 했다. 은영이는 파하하하 웃었다. 이미 그녀는 조국을 떠나 독일 땅에 정착한 것처럼 한국 남자 멋있어, 라는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년 후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허물을 벗고 완전히 탈바꿈하여 이젠 어엿한 여인으로서 은영이가 앉아 있었다.

“언제 왔어? 독일은 어떡하구.”

“그것보다도 결혼했어요?”

“아직.”

“잘 됐네. 애인은?”

“후후, 없어”

“더욱 잘 됐네.”

마치 나는 칭찬받을 일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한 약속, 아직도 유효하다면…….”

“약속, 약속이라니?”

오 년의 공백은 그다지 골이 깊지 않았다. 몇 번의 대화로 우리는 쉽게 골을 메워 버렸고 더 한층 신비롭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있잖아요. 나를 확인하고 싶다는.”

이번에는 내가 파하하하 웃었다.

“매일 밤 확인해도 되는 특혜를 주고 싶어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그렇구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서로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의 어디쯤에는 용기도 필요하리라. 머뭇거리다가 놓쳐 버리는 사랑도 이 땅에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좋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가족들은 아직 독일에 있어?”

은영이는 독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

“그래, 독일은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으니까. 가자.”

계산을 하는 동안 은영이는 밖으로 나가서 첫째 계단에 머무르고 있었다.

“운치가 있어요.”

“내 문학의 실체를 껴안게 해준 소중한 계단이지.”

그녀가 한 계단 먼저 앞서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봤다. “결코 천박하다고 생각하진 않죠?”

“무슨 그런 말을?”

“나는 오빠의 구속이 아니에요.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스스로 떠날 거예요. 가급적이면 오빠의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할게요. 내게…… 어떤 기대도 하지 마세요. 분명한 것은 오빠의 잃어버린 한 개의 갈비뼈가 아니에요. 그럴 자격도 없구, 자신도 없구. 올 때도 그랬던 것처럼 갈 때도 그렇게 작은 미소로 돌아설 수 있도록 서로를 놓아 주기로 해요. 그럴 수 있겠죠?”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은영이도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소위 말하는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즈음 방송 드라마 한 편을 집필하고 있었다. 부와 명성을 함께 얻었으나 무언가 미진하게 남아 주인공을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시사드라마였다. 마감날짜를 넘기지 않으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곁에서 불편하지 않게, 자신의 존재를 투명인간으로 비춰져 마치 컴퍼스로 그려진 원의 중심이 내게서 비롯되는 양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변화를 소중하게 받아 들였다. 방에 진열된 몇 점의 수석이 깨끗하게 닦여졌고 어항의 이끼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묵혀둔 빨래가 빨랫줄에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비로소 내 영토가 푸르게 되어갔다.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김치찌개 냄새까지 놓치지 않았다. 왜 일찍 결혼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영이의 등장은 내게 던지는 메시지가 컸다. 진정한 자유는 혼자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톱니바퀴가 어긋나지 않게 도와주는 공범자가 필요한 것이리라. 용기가 수반된.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술술 글이 써졌다. 마감 날짜를 어기지 않고 탈고된 원고를 방송국에 가져다주기 위해 나설 때였다.

“오빠, 나 내일 짐 좀 가져올게.”

그러고 보니 은영이는 정말 달랑 몸만 가지고 영토에 입적한 셈이다. 내 청바지를 둥둥 걷어 입거나 와이셔츠 앞을 질끈 동여 메고 편안한 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 다녀와. 어딘데? 독일?”

“가까운 곳이야. 아무튼 갔다 온다.”

“그렇게 하십시오.”

밖으로 나오니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은영이에게 두 팔로 크게 흔들어 주었다. 고향에도 그녀를 한번 데려가야 하고 병구에게도 인사시켜야 하는데, 원고 청탁받았을 때보다 마음이 더 급해져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마술사 은영이. 그녀가 다음날 정말 짐을 가져왔다. 저녁 여섯시쯤 되었을까. 분홍색 물감을 엷게 타서 붓으로 휙휙 뿌려놓은, 그네의 머리위로 반짝 빛나는 서산하늘이 좋았다. 아이들이 매달려 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그네는 두 팔로 분명하게 지탱하고 있는 골리앗처럼 당당하게 보였다. 노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나간 은영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떠난 것일까. 이제는 큰 부피로 다가와 버린 은영이의 존재가 너무나 절실했다. 그녀의 부재중은 필요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결혼이 그녀에게 족쇄라면 서둘러 식을 올리고 싶었다. 그만큼 아련하게 숨통을 죄고, 가슴에 둥지를 튼 채 깊은 체온을 나누고 있음이라. 같이 동행하려는 나를 굳이 만류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려면 어떤가. 빨간 능금 반쪽이 서산에 걸려 있었다. 그 때였다. 능금 반쪽을 베어 먹은 범인처럼 그네의 가랑이 사이 저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무언가에 실려 있었다. 자전거였다. 그 모습이 너무 생소하여 짐짓 환시를 느끼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 환시를 더욱 부채질해주는 것은 놀이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모래 장난하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네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한 은영이는 시소에 걸터 앉아있는 내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온 탕아 같지 않아요?”

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은영이가 타고 온 자전거는 장바구니가 앞에 달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바구니 안에는 몇 점의 옷이 잘 개켜져 있었고 짐받이에는 모서리가 낡은 가방 하나가 실려 있었다.

“웬 자전거야?”

아까의 조바심을 감추기 위하여 볼멘소리로 물었다

“자전거가 아니고 은미예요”

“은미?”

“은영이 미래란 말이에요. 자신의 이름을 모르면 은미는 절대 고분고분 하지 않아요. 오빠도 은미의 등을 빌리려면 이 점 명심해야 돼요.”

노을빛을 받아 불콰해진 얼굴로 정색을 하고 있는 은영이가 귀여웠다. 어쩌면 은영이가 꿈꾸고 있는 것은 정착이리라. 지렁이를 잡아서라도 살붙이 하나 없는 독일에서 정착하고 싶었던 아버지처럼 그녀도 자신의 영토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어떻게 하여 다시 이곳으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지난 몇 해 동안 부평초처럼 살아왔다. 늘 은영이가 소망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때는 먼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은영이의 앙금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내 이전에 거쳐 간 남자들. 내 이전에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새겨버린 아픔의 덩어리. 한때 생살을 뜯어내는 아픔의 과거에서 꼬깃꼬깃하게 여며왔던 미래라는 은영이의 자전거ㅡ은미는, 다음날부터 식사시간 외에는 놀이터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그녀와 함께. 어쩌면 내가 집에 없으면 식사시간조차 거르고 놀이터에서 고군분투할지 모를 일이었다. 고군분투라는 표현을 해놓고 피식 웃었다. 그 말이 가장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 때쯤 들어온 은영이의 얼굴에는 햇볕에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차리면서 쉴 새 없이 쏟아내었다.

“오빠, 뒷바퀴를 든 채 전진할 수 있어요? 오류동에 있을 때 아참, 아무튼 그전에는 앞바퀴를 들고 전진했거든요. 근데 자전거는 왜 후진을 할 수 없죠? 그 덕분에 묘기가 줄었잖아요. 사실 은미는 너무너무 예뻐요.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내가 부리려고 하는 묘기를 척척 해 주거는요”

보를레르처럼 살고 있는 후배시인이 보내준 글을 읽고 있다가 난데없는 은영이의 따발총에 멍하니 주방을 바라봤다. 찌개 끓는 소리와 수돗물소리 사이로 난사되고 있는 총알의 무게로 시인(詩人)을 밀쳐둔 채 그녀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해 놓은 묘기는 끝이 없어요. 정지된 채로 오래 버티기,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핸들 뒤로 하여 전진하기, 아참 핸들 하니까 생각나네요. 내일을 향해 쏴라, 봤어요? 아름다운 남자 폴 뉴먼. 핸들위에 여자를 태우고 새처럼 자전거를 타던 장면은 압권이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를 보면서 자전거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죠. 자전거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아름다운 남자 폴 뉴먼을 위하여”

물 잔을 높이 들었다가 마시는 그녀를 보면서 새삼스럽기 보다는 이미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여성지에 보내야 될 수필에 매달렸고 은영이는 자전거에 매달려 있었다. 그 매달림은 무엇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생활의 방편이 되다시피 해버린, 한때 열렬히 갈망했던 작가라는 소명의식을 암중모색 안에서도 기필코 반딧불 같은 글을 빚어내리라. 그래서 저마다 구덩이를 파고 동면해 버린,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 깨달음의 실체를 조금씩 나누어 주고 있는 은영이로부터 길어 올리고 있는 두레박에 담긴 우물물. 안다. 더욱 더 낮은 포복으로 전진해야 한다. 돌아 앉아 포기해 버렸던, 고갈된 은근과 끈기를 은영이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항상 마감일에 쫓겨 허둥대는 게으름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애써 간신히 채워 넣은 탈고된 수필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생각에 시간을 뺏기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가득한 정적 안에 갇혀 있었던 스물 네 평의 아파트가 갑자기 들썩거렸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야, 보고 싶다.”

병구! 없어진 꼬리가 돋아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면회 올 수 있지?”

“내일?”

“아무튼 와야 해. 네가 없으면 안 돼.”

달력을 쳐다봤다. 이미 몸에 배어 버린 버릇으로, 마감일에 임박한 원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내일 간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피곤했던지 소파에 깊게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눈을 뜨자 은영이가 옆에 앉아 있었다. 웃음을 가득 베어 물고. 질 좋은 휴식을 한 듯 머릿속은 맑았다. 

“오빠, 멋진 장소를 발견했어요.”

“멋진 장소라니?”

“아파트 뒤에 있는 언덕 말이에요.“

“유일하게 그 전에 여기가 산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곳이지. 그런데, 왜?”

“그 언덕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뛰어내리면서 공중회전을 시도하려 하거든, 내 생각이 기막히지 않아요?”

“위험하지 않을까. 족히 삼 미터는 될 건데”

“위험은 어느 곳에서도 매복해 있어요. 도전은 아름다운 거지.”

나는 병구 이야기를 했다.

“어때? 같이 가지 않을래?”

“다음에 갈게. 내일 시도하려는 공중회전 때문에 잠이 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은영이는 쉬 잠이 오지 않는지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잠은 소량의 죽음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아침에 애써 깊은 잠을 잔 것처럼 자기최면덕분에 조금은 상쾌해졌다. 은영이는 벌써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있었다. 빗살무늬 유리에 비친 그녀는 너무나 선정적이었다. 은영이의 몸에서 잠시 멎었다가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 내리는 물방울을 떠올렸다. 그녀가 술에 취해 털어 놓았던 독일의 비밀도 떠올렸다. 부모는 낯선 땅 아헨에서 죽었다. 가스폭발로 부모가 죽던 날 밤, 은영이는 나이트클럽에서 술과 춤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엄청난 죄의식을 느껴서 때때로 목을 조르고 있는지 모른다. 의미 없는 독일을 뒤로 하고 돌아와서 민들레 씨앗처럼 살아왔다. 그리고 신문에 난 내 사진을 보고 찾아왔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병구에게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은영이가 내 허리를 껴안았다.

“오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두천 행 표를 끊었다. 주말이 아니라선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가로수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차선 국도를 들어선 버스는 제법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하늘은 유리에서 반사되어 비춰지는 풍경으로 눈이 부셨다. 수만의 나비 떼가 하늘 가까이에서 맴을 돌면서 세상을 희석시키는 느낌으로 내렸다. 왜 일찍 외출을 생각 못했을까. 다방에서 전화를 걸었다. 속눈썹 같은 열대어들이 어항 안에서 하늘하늘 물결을 일구어 내는 것을 취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병구가 들어 왔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바짝 따라붙고 있는 여자와 함께.

“갈 데가 있어.”

여자와 눈인사를 한 내 손을 잡으며 병구가 일어났다. 운전병이 딸린 군용 지프가 대기 중이었다.

“대대장이 내게 보낸 결혼선물이야.”

결혼선물?

“너 결혼했니?”

“그래서 너를 부른 거야. 우리 두 사람 증인이 돼 달라는 거지.”

지프는 한탄강 어귀에 도착했다. 이미 운전병과 무슨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앉은뱅이 상에 촛불 두 개를 밝혀 부산하게 올려졌다. 운전병은 식의 진행을 적어 놓은 종이를 보면서 읽기 시작했다. 오월의 향기에 빠진 한탄강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은영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물론 병구가 알려주지 않아서 몰랐지만 그래도 추측은 가능했으리라. 아무튼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무게로 기우뚱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미 식이 끝났는지 두 사람은 운전병과 나를 남겨둔 채 깊은 입맞춤을 했다. 자연히 지프에서 운전병과 기다렸다.

“친구 분이니까, 더 잘 아시겠지만, 최중사님이 얼마나 저 여자와 살 지 의문입니다.”

“그게…….”

“전 그렇습니다. 분명 센티한 감정으로 저 여자를 선택했다고 봅니다. 최 중사님은 사랑이라고 덧칠을 하지만 곧 빗물에 씻겨 바닥이 드러나고 후회하게 될걸요. 종내에는 저 여자도 불쌍하게 되고 최 중사님도 마음의 상처는 남게 되겠죠. 저 여자에게 얼마나 많은 군바리들이 거쳐 갔는지 아십니까. 꽤 알려진 갈보였어요.”

오월은 그래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가 보다. 햇살의 부스러기들이 나직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물결은 고요한데 분명 바람은 향기를 싣고 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서울까지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비명이 들려올 때 신혼 방을 습격하겠노라고 병구와 악수를 했다. 여자에게는 예의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차멀미를 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한탄강에서 안주삼아 먹었던 오징어가 체한 것일까. 비닐봉지에 가득 토해놓고 보니 오장육부를 다 드러낸 듯 통쾌함도 없지 않았다. 저녁공기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했다.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입구에서 편지함을 확인했다. 수필이 실려 있는 악기회사 사보가 꽂혀있었다. 사보를 손에 쥐고 엘리베이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저쪽에서 수위가 뛰어 왔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빨리 경찰서로 가보시죠.”

병원이 아니고 왜 경찰서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경찰서를 향해 뛰었다. 사복 차림을 한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

“죽은 여자의 남편 되십니까?”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렇습니다만 은영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곽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목뼈가 부러졌어요. 강간한 흔적도 없고 누군가 언덕 위에서 밀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 그럴 수가…… 그렇다면 은영이는 정말로 공중회전을 행동에 옮겼구나.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체를 옮긴 흔적도 없고, 강간이라든지, 금품을 노렸다든지 그런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전거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런 곳에서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고…… 자살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석훈 씨 오늘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인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은영이가 자전거 하나로 세상을 바꾸어 보려고 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아니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설혹 이야기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알리바이가 확인되었다. 나를 풀어주었다. 경찰은 아무 증거도 찾지 못하고 미궁 속에서 해매이다가 수사를 일단락 짓고 말리라. 은영이 부모의 죽음과 연관하여 자살로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아니다. 자살이 아니고 아름다운 도전이었다는 것을. 병원으로 찾아갔다. 시체부검이 끝나고 이상이 없으면 삼일 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왔을 때 비로소 은영이의 존재를 극도로 느꼈다. 그녀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은미가 있다. 부랴부랴 수의실로 뛰어갔다.

“그 사람 자전거 여기 있죠?”

“예, 단서가 될지 모른다고, 일단 여기 놔두었죠.”

수위실 옆에 은미가 누워 있었다. 일으켜 세웠다.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은미의 등에 내 체중을 실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달렸다. 아파트 뒤로 돌아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언덕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어둠은 한 목소리로 깊어지고 있었다. 언덕을 은미와 함께 오르는 동안 어둠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들려 왔다.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 은미의 등에 올라탔다. 은영아, 보고 있니. 공중회전은 이렇게 하는 거야. 앞으로 체중을 실으면서 힘차게 페달을 밟자 은미와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핸들을 틀면서 공중회전에 도전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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