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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내 서울 생활
張祜誠 조회수:2164 211.201.116.203
2016-03-10 15:20:17
그렇게 시작한 내 서울 생활
張祜誠

오늘 아침에는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아내가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살짝 뽀뽀를 해본다. 아내는 잠결에도 내 뽀뽀를 받아준다.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자고 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오늘도 벌써 이렇게 더운 걸 보니 한낮에는 장난이 아니겠다 싶은 게 아내는 오늘 하루도 고생하겠구나! 더위와 싸우랴, 하나 도와주지 못하는 집안일 하랴, 우리 ‘두레가정(장애인자립공동체)’ 일 보랴, 내 짜증 받아내랴.

참, 저런 여자가 어찌 나 같은 놈한테 시집왔을까? 난 평소에 장가갈 생각은 했었지만 그건 막연한 기대였고 막상 누구, 아니 어떤 여자하고 결혼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는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막막한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도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다 보니 화려한 외출이 아니더라도 마음 편히 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결혼은 무슨 결혼. 그렇다고 남들처럼 혼자 살 수 있는 몸도 아니기에 3년여의 궁리 끝에 그래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편한 대도시로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 살 만한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장애인 신문, 컴퓨터 통신 동호회, 장애인복지관에서 나오는 장애인과 관련된 정보는 모조리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놈의 인터넷이라는 게 아직 보편화는커녕 몇몇 전문가들만의 공간이었기에 정보 수집은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방구석에 누워서 정보 수집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볼 만하다 생각되는 곳이 있으면 친구와 함께 직접 찾아갔던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은 ‘국립재활원’이었다. ‘국립재활원’에서 컴퓨터를 체계 있게 배워 그것을 발판 삼아 서울 생활을 시작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적성검산가 뭔가 받았는데 그 검사는 무난하게 합격했다.

그런데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 기숙사 생활이 문제였다. 지금같이 전동휠체어만 있었어도 그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그때는 전동휠체어가 우리나라에 막 소개되기 시작하던 때라 나에게 그 전동휠체어는 먼 미래의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 찾아갔던 곳은 모두 공동체 간판만 그럴듯했지 하나같이 내가 20여 년을 살아왔고 또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시설이 전부였다. 길이가 3~40미터 되는 건물 가운데 긴 복도가 있고 그 복도 양 옆으로 그만그만한 방들이 쭉 늘어서 있는 그야말로 완전 고아원 식이었다. 방 이름도 1호, 2호, 3호. 아니면 온유방, 겸손방, 믿음방. 이렇게 방에 이름까지 붙여 놓고 장애인 10~15명을 편리하게 관리 수용하는 그런 시설들뿐이었다.

그래, 먼저 이놈의 지긋지긋한 단체생활에서 벗어나자. 그 다음은 그때 가서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중증장애인들이 흔히 살아가는 방식인 단체생활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그룹홈’이라는 제도가 막 들어오는 시기였기에 그 제도가 뿌리 내리기에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어딘가 하나 정도 우리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나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겠지 싶어 찾고 또 찾았다.

그러던 중 ‘장애인복지신문’에 자립을 원하는 장애인은 연락하라는 신문기사가 눈에 띄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던데 그 말이 진실인가 싶은 게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나같이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생활을 못 하는 중증장애를 가진 내가 단체생활이 아닌 독립생활을 할 수 있을까?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 되든 안 되든 한번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서울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했다, 나 좀 데리러 오라고. 그 당시 나는 강원도 화천에 있는 고향 아저씨 같은 목사님이 운영하는 ‘시골집’이라는 공동체에 살고 있었다.

친구와 고덕동에 오던 날.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그 ‘두레가정’이 허허벌판에 외따로 서 있는 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골목을 꼬불꼬불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주택단지였다. 그것도 다세대주택단지. 똑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러 집 가운데 그 집은 지하1층 지상3층 건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반지하층은 경사로가 설치되어 나같이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1층과 2층은 몸이 좀 자유로운 장애인들과 세입자들이 살고 3층은 집주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날 나를 맞이하는 집주인의 인상은 여느 아줌마(아주머니가 아닌 아줌마)의 인상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반신반의하는 힘없는 소리로 살러 왔다고 하자 집주인은 무조건 짐 싸들고 오라는 말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내가 놀라고 말았다. 집주인이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내가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몸으로 내가 혼자 생활할 수 있을까? 더구나 돈도 없다. 방세는 고사하고 생활비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한번 생각해보자는 말 한마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같이 살아보자고 하는 것일까? 그런 내 심정을 알았는지 집주인은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다 같은 경우로 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번 시작해보자며 장애인들이 ‘두레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집주인이 들려준 자립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손은 쓸 수 있고 발을 쓰지 못하는 친구는 발은 쓰고 손을 쓰지 못하는 친구와 한 가구로 같이 살게 하고, 지능이 떨어지고 몸이 자유로운 친구는 지능이 있고 몸이 불편한 친구와 또 한 가구로 살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내가 강원도 화천 ‘시골집’에서 내가 손이 있으면 네게 손이 되어주고, 네게 발이 있으면 내게 발이 되어주며 살아온 방식이었기에 적응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경제력이었다. 숟가락도 없이 밥을 먹을 수는, 아니 먹을 밥까지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집주인은 그것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영세민(그때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기 전이다)에게 지급되는 생계비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 그렇게 먹는 것과 입는 것은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방세는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은 집주인인 당신이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몸이 자유로운 친구는 취로사업(就勞事業, 실업자나 영세민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정부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공공사업)을 알선해 주고 몸이 자유롭지 못해 취로사업도 못 하는 친구에게는 일정기간 무료로, 집세 없이 살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취로사업을 하고 일정기간 무료로 살게 해줘도 생활이 어려운 친구에게는 미리 기한을 정해 두고 후원자를 연결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후원자를 연결해준 당신까지도 후원자를 연결해준 선에서 끝나고 후원자가 얼마를 후원하는지는 당신도 모르게 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상처만 받고 기죽어 살아온 장애인들을 배려하고 하루라도 빨리 자립시키기 위함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는 자신이 없어 한번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화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화천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서울에서 살아가는데 한 달 평균 생활비가 얼마 정도 드는지부터 시작해서 주거비는 얼마나 드는지, 이것저것 알아봤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여를 보내고 내린 결론 역시 어떻게든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 조금씩 저축도 할 수 있었고 5년 후에는 당당하게 세입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결혼도 해 집사람과 함께 ‘두레가정’의 총무로 일하다가 지금은 동대문에 있는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오늘도 난 아내한테 짜증만 냈다. 그런 아내한테 난 항상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여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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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祜誠 63년 생 뇌병변1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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