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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직 업: 서양화가
-장 애: 지체장애
-이 메 일: ysk1433@naver.com
-홈페이지: cafe.naver.com/kys777
<활동분야>
<학력>
<주요경력>
<전시경력>
[개인전]
[초대전 및 단체전]
김영수는 대학 2학년 당시 검도부 합숙훈련 후 고열과 함께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았다. 얼마 후 기력은 회복했으나 빠진 근육은 회복되지 않았고, 차츰 다른 부위의 근육도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1977년 2월, 대학졸업 후 그는 비장한 각오로, 3년 전부터 봉사활동을 하던 야학으로 거처를 옮겨 낮엔 기도생활을, 밤엔 야학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7개월 정도 지나자 그의 몸은 더욱 수척해졌다. 근육이 마르는 것이 빨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1년 전에 할 수 있었던 움직임을 1년 후에는 어렵거나 못하게 되는 그런 식의 진행이었다.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보니 진행성 근육 이영양증이었다. 의사는 발병원인도 치료방법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8일간 입원을 하고 퇴원한 그는 앞으로의 삶에 막연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절망하거나 큰 슬픔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병과의 싸움이 장기전이 될 것을 예상하고 취직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설계 전문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밤 새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조금만 과로해도 후유증이 여러 날 갔다.
그는 여러 생각 끝에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택하기로 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오전에는 그림을 배우고, 오후에는 남대문시장 누님의 옷 가게에 나가며 용돈을 벌었다. 소식을 들은 둘째 누나가 미국에 와서 치료 받아 보라고 하였고 치료 받고 나으면 곧장 뉴욕으로 가서 미술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1982년 11월말 남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병원 이 곳 저 곳을 다녀보았는데 근육병이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별 치료방법 없기는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떠난 지 3년만인 198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옆에서 부축하고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1991년 12월 어느 날 밤, 문득 TV를 켠 그는 한 구족화가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문득 그 화면이 떠올랐다. 자신도 한 번 해봐야겠다 생각한 그는 연필을 입에 물고 주전자 정물화를 그려보았다. 힘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월했다. 그렇게 그림을 시작하였다.
1997년 당시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공개크로키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 반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작품활동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치 수술실의 의사처럼 진지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가는 작가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누드크로키를 해보자는 생각에 바로 문화센터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수강생 세 명이었던 것이 점차 줄어들더니 강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는 이참에 하나 만들자 싶어서 계획에 들어갔고 최초 장애인 누드크로키 모임인 <선사랑 드로잉회>를 만들게 되었다.
선사랑 드로잉회의 회원은 현재 50명이고 1년에 2회 정도 모임을 갖는데 17명 정도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내의 서울장애인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도 하며 모임을 갖고 있다. 크로키기법이 수채화나 유화보다 쉽고 접근이 용이하기에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전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11년 개인전에서 ‘도시이야기’를 주제로 산동네만의 미학적인 부분을 담을 예정이다. 그리고 현재 「솟대문학」의 준회원으로서 20~30대 시절 써놓은 산문을 모아 놓고 있는데 젊은 시절 근육병으로 인해 고민했던 내용이 담겨져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내년쯤 산문집으로 출간하고픈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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