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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발레리나 고아라
emiji 조회수:2534 211.211.92.95
2018-05-26 10:41:00

 

 

대중예술


 침묵 속의 발레리나 고아라

 
 
 
 

아직도 생생한 것은 1995년 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헤더 화이트 스톤의 수화 인사이다. 그녀는 청각장애로 미스 아메리카 호명을 듣지 못해 2등 미인의 축하 키스를 받고 나서야 자신의 당선을 알아채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다. 이런 모습을 끝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2012 World Miss University 한국대회에서 성실상을 수상하고, 2013년 1월 미스데프코리아 (Miss Deaf Korea) 에 출전 하여 미스 진이란 타이틀을 받아 한국을 대표해서 2013년 7월 체코에서 열린 Miss Deaf World 에 참가하여 한국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발레리나 고아라 씨에게 왕관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어서 만나 봤다.
 


결혼 소식이 있던데.
 
드디어 4월 21일에 결혼을 한다. 2009년 8월에 처음 만나 9년 동안 연애를 했기 때문에 우리 결혼은 운명인 것 같다.
 
 

 

어떻게 만났는지.
 
우린 경희대학교 CC (캠퍼스 커플) 이다. 오빠는 공대생이어서 수원에서 다녔고 나는 무용학과여서 서울캠퍼스에서 공부를 했다. 대학 3학년 때 경희봉사단 기획단 활동으로 러시아 봉사 활동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오빠를 만났다. 연해 주에 정착한 고려인 집지어 주는 사업이었는데 오빠와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러브 스토리가 궁금하다.
 
그곳에서 2주 동안 매일 거의 함께 지내다가 돌아와서도 가끔 만났다. 전화 로는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작은 일로도 만나게 되었는데 한 달쯤 지났을때 어느 날 오빠가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는데 사귀자고 프로포즈를 해서 연인이 되었다. 당시는 학생이라서 큰 부담 없이 프로 포즈를 받아들였다. 그 후 오빠는 내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서울 공연은 물론이고 지방 공연이 있을 때도 와서 도와주었다. 친구들이 CC가 아니라 갑과을이라고 놀릴 정도로 나를 위해 헌신하였다. 현재 오빠는 특허청 산하기관에서 근무를 하느라고 대전에 있다. 주로 카톡을 하고 영상통화를 한다. 목소리가 익숙해지면 간단한 전화통화는 가능하다. 요즘은 핸드폰 블루투스가 소리를 모아서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화 통화가 더욱 쉬워졌다.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시댁에서 저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 주었다. 오빠가 내 공연 때 자기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드렸고, 그럴 때마다 잘한다고 칭찬을 해 주셨던 분들이라서 나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아마도 오빠가 부모님을 잘 설득한 것 같다.
 
 

지금 인터뷰를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듯.
 
생후 4개월에 고열로 몹시 앓고 난 후 아기가 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감각 신경성 난청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먹통이고 왼쪽은 보청기를 사용해서 소리를 인지한다. 젓가락이나 펜을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하여 말을 잘 한다는 소릴 듣지만 크 발음 같은 된발음이 잘 안 된다. 요즘은 보청기도 귓속형이어서 겉으로 보이지 않아서 청각장애인인 줄 모르고 말을 거는 분들이 많다.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학교를 계속 일반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수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유치원을 구화유치원 (입모양을 보고 대화) 에 다녔고, 집에서도 구화를 사용해서 수화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농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학창 시절의 어려움은.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생활이 힘들어졌다. 철없을 때에는 친구들이 말소리가 조금 이상하다는 정도로 생각하더니, 이성적으로 발달하면서 ‘너는 우리와 다르다’ 라고 편을 가르는 것이었 다. 요즘은 그것을 왕따라고 하지만… 친구들이 편을 가를수록 나도 그들을 밀어냈다. 한 가지 예로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돌아본다. 보청기를 착용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불러봤어’ 라며 웃었다. 내가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실험해 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까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는 불러도 모르는 척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을 읽고 누구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이 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발레를 시작한 것은.
 
5살 여자 아이가 고기 3인분을 혼자 먹을 정도로 대식가였다. 자꾸 뚱뚱해지니까 엄마가 발레 학원을 보냈다. 7살에 발레학원에 처음 갔을 때 연속 두 바퀴 회전을 완벽하게 해낼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그때는 서예, 피아노 등 이것저것을 배우고 있었는데 발레가 가장 재미있었다. 그래서 꾸준히 발레를 했다.
 
 

모스크바 국립발레학교 연수는.
 
엄마는 내가 발레를 전공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지 상담하기 위해 상명대학교 발레전공 교수 님을 찾아뵈었는데 마침 발레 연수가 있으니 참가해 보라는 권유에 2002년 2월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현 모스크바 국립발레학교) Workshop에 참가하였다. 발레를 잘하는 중고등학생 10명이 참여했는데 내가 제일 뒤쳐졌다. 모두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세계적인 발레학교에서 발레리나들을 보니 내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가를 깨달았다. 그때 정말 잘 하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홍천에서 서울로 매주 한 번씩 레슨을 받으러 올 정도로 발레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경희대학교 무용과, 대학원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고등학교를 춘천에 있는 예고를 다니며 대학 진학을 무용으로 정했기 때문에 대학 입학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학 4년 동안 아주 성실한 학생이었다. 학교 공연 때도 비장애인 학생들과 똑같이 연습하며 무대 위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키가 커서 항상 눈에 띄인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시작되었 다. 전문 발레리나로 성장하기 위한 길은 상상 외에 험란했다. 대학교만 졸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졸업 후의 진로는 암담하였다. 교수님이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시어 대학원에 진학하면 뭔가 달라지겠지 싶어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진학을 하였다.  솔직히 공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도제 제도로 키워지는 예술계 시스템을 견디기 어려웠다.

 


슬럼프가 온 이유는.
 
청각장애인 무용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박사과정으로 진학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발레 이론이 아닌 발레 실기를 원했지만 무대는 나를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겨 냈는가.
 

일단 그 답답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몽골에 있는 친구에게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 다. 안식년 같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로 했다. 멀리 떠나서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비장애인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비장애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비장애인 세계에서 나는 농인이었다. 그런데 농인사회에서는 수화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나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농세계에도 끼지 못하고 비장애인세계에서 배제당 하는 떠돌이 같았다.
신기한 것은 꿈에서는 수화를 하거나 자막이 나오는 꿈을 꾼다. 내 잠재의식 속에 농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돌아와 수화를 배웠다. 오빠도 함께 수화를 배웠다. 고유명사는 지화 (손가락 수화) 로 표현을 해야 정확하기 때문에 오빠는 지화를 배우기로 하였다.
 


대학 시절 대외 활동을 활발히 했던데.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World Miss University 한국대회에 2012년 참가했다. 지덕체 (知德體) 를 겸비한 여성을 선발하는 대회이다. 참가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이미전 대회에 참가했던 룸메이트가 참가를 적극 권하였다. 그런 대회 도전이 너무나 큰경험이 되었다는 말에 결과에 상관 없이 출전하였다가 성실상을 수상하였다. 그때 도전 정신을 갖게 되어 2013년 1월 미스데프코리아 (Miss Deaf Korea) 에 출전하여 미스 진이란 타이틀을 받았다. 정말 아름다운 농아인들이 많았다. 그때 처음으로 농인 세계를 피부로 직접 접할 수 있었다. 한국을 대표해서 2013년 7월 체코에서 열린 Miss Deaf World에 참가하여 더 넓은 농인 세계를 경험하였다. 대회 출전을 위해 배운 국제수화로 그들과 대화를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장기로 발레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나는 세계대회에서 전체 9위, 아시아 1위를 기록하였다. 세계대회를 준비하며 SBS 슈퍼모델 선발 대회에도 출전하였다. 청각장애인으로는 처음 도전이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런 활동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방송에 나가는 것도 꺼려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 댄스오디션에 도전하고, 국가적인 장애인 행사 참여도 자유로워졌다. 2015년에는 Miss world Korea, 2017년 Miss Global Beauty Queen에 참가하여 청각장애인 으로 세계대회에 도전하며 많은 경험을 하였다. 그런 활동들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발레를 하며 느낀 한계는.
 
발레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일이겠지만 발레를 포기한 진짜 이유는 발레 단계가 높아질수록 고난위 연기를 해야 하는데 토슈즈를 신으면 진동을 느끼기 어려워 소리를 듣고 연기하는 발레리나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요즘은 공연에서 현대 무용을 하는데 맨발로 하기 때문에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발끝에서 그대로 온몸으로 전해진다.
 

 

 
엄마의 지원이 컸다고.
 
발레를 했다고 하면 집이 부자인 줄 알지만 아버지는 생활 능력이 없는 분이라서 엄마가 옷가게를 하며 가정을 꾸려 가셨다. 남동생이 있는데 동생도 많이 도와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리나라 88년생들은 취업에 어려움이 가장 많은 세대라고 한다. 개인 눈높이는 높아졌으나 사회 눈높이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일단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폐막식에서 공연을 한다. 나로서는 잊지 못할 무대가 되겠기에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고아라

 

# 학력 및 경력
 
덕원예고 무용과 졸업 경희대학교 및 동대학원 무용학 학·석사 졸업 / BalletNova 수석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발레학교(구 볼쇼이발레학교) 연수 빛소리 친구들 객원, K-Wheel Dance Project 창단 멤버 외.
 
# 수상 및 자격증
 
중앙무용문화연구원 대회 금상, 경희대학교 대회 2등상, 한국발레연구학회 대회 대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상 대중예술상 이외 다수 World Miss University 성실상 / Miss Deaf Korea 1위 / Miss Deaf World(Czech) TOP9, 아시아 1위 Miss World Korea 3관왕 / Miss Global Beauty Queen TOP15, Peace Ambassador -라인댄스 1·2급 지도자 자격증 동시 취득, 중등교사 2급 교원자격증(무시험검정) 외.
 
# 주요 국내외 공연
 
국내: 한국발레협회, 한국발레연구학회, 최승희 춤 축제,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 전국장애인체전 개막식 이외 소규모 공연 다수 국외: 러시아 우수리스크 마을 축제, 체코 공연, 중국 국제교류 만찬 행사 기념 공연 외.
 
# 기타 활동
 
에스더 리 한복패션쇼, Miss World Korea DMZ 패션쇼, Deaf Runway 심사위원 경희대학교 경희봉사단 기획단 및 Happy Plus(장애학생&비장애학생 단체) 활동 방송 출연: 몽골 BTV 다큐, KBS3라디오, SBS <스타킹>, KBS <인간극장> 출연 도서: 대학생이 바라본 대학문화(공동 출간), 몽꼴: 꿈의 모습(소장용)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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