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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직업 : 서양화가
-장애 : 근육장애
-이메일 : ysk1433@naver.com
<활동분야>
<학력>
<주요경력>
<전시경력>
[개인전]
[초대전 및 단체전]
[그룹전]
김영수는 대학 2학년 당시 검도부 합숙훈련 후 고열과 함께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았다. 얼마 후 기력은 회복했으나 빠진 근육은 회복되지 않았고, 차츰 다른 부위의 근육도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1977년 2월, 그는 대학졸업 후 비장한 각오로, 3년 전부터 봉사활동을 하던 야학으로 거처를 옮겨 낮에는 기도생활을, 밤에는 야학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7개월 정도 지나자 그의 몸은 더욱 수척해졌다. 근육이 마르는 것이 빨리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1년 전에 할 수 있었던 움직임을 1년 후에는 어렵거나 못하게 되는 그런 식의 진행이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니 진행성 근육 이영양증이었다. 의사는 발병원인도 치료방법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8일간 입원을 하고 퇴원한 그는 앞으로의 삶에 막연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절망하거나 큰 슬픔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병과의 싸움이 장기전이 될 것을 예상하고 취직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설계 전문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밤을 새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조금만 과로해도 후유증이 여러 날 갔다.
김영수는 여러 생각 끝에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택하기로 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오전에는 그림을 배우고, 오후에는 남대문시장 누님의 옷 가게에 나가며 용돈을 벌었다. 소식을 들은 둘째 누나가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라 하자 치료를 받고 나으면 곧장 뉴욕으로 가서 미술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982년 11월말 남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병원 이곳저곳을 다녀보았는데 근육병이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별 치료방법이 없기는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떠난 지 3년 만인 198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옆에서 부축하고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1991년 12월 어느 날 밤, 문득 TV를 켠 그는 한 구족화가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문득 그 화면이 떠올랐다. 자신도 한 번 해봐야겠다 생각한 그는 연필을 입에 물고 주전자 정물화를 그려보았다. 힘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월했다. 그렇게 그림을 시작하였다.
1997년 당시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공개크로키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 반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작품활동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치 수술실의 의사처럼 진지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가는 작가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누드크로키를 해보자는 생각에 바로 문화센터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수강생 세 명이었던 것이 점차 줄어들더니 강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는 이참에 하나 만들자 싶어서 계획에 들어갔고 최초 장애인 누드크로키 모임인 <선사랑 드로잉회>를 만들게 되었다.
선사랑 드로잉회는 1년에 2회 정도 모임을 가지며 잠실 종합운동장 내의 서울장애인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도 하며 모임을 갖고 있다. 크로키기법이 수채화나 유화보다 쉽고 접근이 용이하기에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2011년 개인전에서 ‘도시이야기’를 주제로 산동네만의 미학적인 부분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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