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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화백, 예술은 긴장인 동시에 해방이다
emiji 조회수:432 221.139.210.149
2017-07-09 19:24:00

 

“예술은 긴장인 동시에 해방이다”


김영빈 화백

 

 

김영빈 화백

 

 

꿈꾸는 소년

나는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장아장 걷던 3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양하지마비가 되었다. 그림에 일찍부터 흥미가 있어 초등학교 때 엄마 등에 업혀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타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독학으로 전자공학을 공부하여 회로를 보고 부속을 사다가 진공관 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전축 등을 조립할 수 있었다.

전기기타 앰프를 만들어 4인조 그룹사운드를 결성하여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연주를 하였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요즘은 장애보조기술과 컴퓨터 등의 발달로 장애인이 공학도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할 수 있지만 1970년대에는 장애가 있어 걷기 힘든 사람이 공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좌절감으로 진로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故 변시지 선생님과의 작은 사건이 미술로의 결정을 굳건히 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시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던 분이었는데 일본에 계실 때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학창 시절 남학생들은 미술재료를 준비하는 것이 귀찮아서 교실 뒤로 불려나가 미술 시간이 끝날 때까지 벌을 받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종종 그랬다.

어느 날 벌을 면제받으려고 나는 친구에게 스케치북 한 장을 얻어 그 종이 위에 점심 도시락 밥풀을 손톱으로 으깨어 붙였다. 그 위에 볼펜으로 형태를 그리고 색칠도 하였다.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볼펜 가는 대로 으깨어진 밥풀 위에 끄적거리는 것이었는데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 몰두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보고 계셨던 모양이다. 제대로 미술도구를 준비하지 않고 장난치는 모습을 들켰으니 벌을 받을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시며 나보고 미술을 하라고 칭찬해 주셨다. 먼 훗날 결혼을 하고 알게 되지만 아내의 이모부 되시던 선생님은 2013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제주도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시는 선생님을 아내와 함께 찾아뵈었다. 식사를 하며 술을 따라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약 그때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붓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을 만나고

본격적인 그림은 장리석 선생님(1916년생, 2017년 올해 한국 나이로 102세) 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나의 미술 경력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들어가는 문구가 있다. 바로 ‘장리석 화백 사사’라는 것이다.

나는 일요일과 명절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씩 4년 동안 장리석 선생님 작업실에서 있었다. 점심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제자를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장 선생님께서 나를 받아 주신 것은 장애 때문에 대학도 가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고향 (함경도) 죽마고우인 아버지의 부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내가 그려 온 그림들과 선생님께서 시키셨던 과제를 평가한 후 허락을 하셨지만 말이다. 화가의 꿈을 갖게 되었지만 화실 생활이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2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이었기에 때로는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있었다.

나태해질 때도 있었고,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스트레스로 캔버스가 보기 싫은 때도 많았다. 또 유화 기름 냄새로 현기증을 느꼈고 같은 또래 친구들과 맘껏 어울리지도 못하였다.

그림을 그리기 싫어도 화실에 나와 놀라고 하시는 엄격한 선생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화폭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도를 닦는 기분이었다. 그림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공모전에 출품도 못하게 하셨고, 그림도 빨리 완성하지 못하게 하셨다.

내가 보기에는 다 완성된 것 같은 데도 더 연구하고 고칠 곳을 찾아보게 하셨다. 한 번은 A4 용지 정도의 작은 그림을 시작하였는데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수정하기를 한 달이 꼬박 걸린 때도 있었다.

작은 그림 한 점을 가지고 하루에 몇 시간씩 수십 일 동안 매달리는 것을 보시고도 어디가 틀렸는지 어디를 수정해야 하는지 등의 말씀 없이 스스로 더 찾아보라고만 하시며 새로 다른 것 그린다고 해도 허락을 안 하셨다.

나중에는 오기가 발동하여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인내와 끈기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때의 훈련 때문인지 지금도 그림을 쉽게 그리지 못한다.

 

 

 

멀고 험한 화가의 길

가끔 화실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반가웠다. 대부분 그림 작업하는 선배들이나 교수님들이었다. 안타깝게 일찍 돌아가신 박현규 선배와는 의형제를 맺었었고, 손수광, 최쌍중, 황유업, 최영림, 임응식, 박항섭 등 한국 예술계의 거목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자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예술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그분들의 예술관과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등을 토닥여 주시면서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을 수 있었고 내 그림을 보시고 한마디씩 말씀을 해 주실 때는 신이 났다.

어느덧 4년이 지나갔다. 이제는 장리석 선생님의 그늘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예상했던 대로 화를 내시면서 10년 이상을 선생님 밑에 두려고 하였는데 건방지게 벌써 떠나려 한다고 야단을 치셨다.

선생님의 작품과 독특한 화풍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3층 화실에서 1층까지 부축을 해서 안전하게 배웅을 해 주시던 선생님을 존경한다.

하지만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의 화풍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용납을 못하시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내 마음은 답답했고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후에도 선생님을 계속 뵈었다. 선생님께서 내 작업실에 가끔 오셔서 그림들을 보고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 자신의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을 대견해하셨다.
 

 

 

김영빈 화풍

나의 작업을 크게 나누면 사실적 구상화와 은유적 추상화로 구분된다. 장리석 선생님이 계셨던 당시 중앙대학교 교수 분들은 거의 이북 출신이신 고향 친구들로 구상화 계열 작가 분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구상 계열의 작품으로 기초를 닦았다. 사실적인 구상 그림을 20년 정도 그렸다. 구상과 비구상은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그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 적으로 비구상 그림 쪽에 매력을 느낀다.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나 컴퓨터, 그리고 고화질 TV와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에 사실적 구상화 작업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은유적 추상화 작업을 하다 보니 이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여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의 사조와 예술철학 등에 대한 공부를 더 하였다.

내가 사실적 구상화 작업을 할 때도 사진을 보고 그리는 소위 베끼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선생님 화실에 있을 때 과일 묘사를 공부하기 위하여 쉽게 상하는 실물 과일 대신 모양이나 색감이 정말 똑같은 플라스틱 과일 모형을 종류대로 구하여 화실에 갔다.

실제 과일이 상할 때마다 새로 사서 3층까지 들고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물대 위에 아름다운 구도로 늘어놓았다. 선생님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향기나 맛도 느낄 수 없는 플라스틱을 보고 그리면 네 그림 속에서 과일의 향기와 맛이 느껴지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녀석의 태도가 아니라면서 꾸중을 하셨다. 그 후로는 무엇을 보고 베끼는 짓은 하지 않았고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베끼는 것은 못하게 하였다.

어느덧 그림과 만난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모하게 덤벼들던 20대와 30대 그리고 추상에 이끌리던 40대와 50대. 그리고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보면 새로 만들어질 창작물에 대한 기대와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기도 한다.
 

 

장애인미술에 참여

장애인예술 쪽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 전에는 장애인예술단체가 있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1993년 서울 반포에서 입시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을 당시,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는 젊은 남자가 학원에 칫솔, 비누, 고무장갑 등의 물건을 팔러 가끔 왔었다.

하루는 비누를 몇 개 샀는데, 비누를 쌌던 포장종이가 바로 장애인신문이었다. 구겨진 그 인쇄물에 제3회 장애인미술대전 공고문이 있었다. 장애인신문도 처음 보았고 더구나 장애인미술대 전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었다.

처음 보는 공모전에 관심이 생겼고 공모 요강에 맞춰 두 점을 출품하였다. 결과는 입선과 우수상이었다. 그때는 장애인미술대전에 입선 이상 뽑힌 사람들을 2박 3일 동안 제주도로 초청해 세미나를 열고 스케치 여행을 하며 서로 친목을 쌓게 하였는데 그때 비로소 장애인예술에 눈을 떴다.

그로부터 2년 뒤 1995년 서울역 근처에 있는 벽산빌딩 갤러리 아트빔에서 김남제, 김영빈, 방두영, 원두희, 허남성 5인의 ‘아웃사이더 5’ 초대전이 한 달 동안 열렸다. 이어 같은 해 10월 벽산빌딩 대강당에서 발기인 대회를 갖고 12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다음해인 1996년 2월에 서울시 사회문화단체로 등록하였다.

‘아웃사이더 5’전에 참여한 화가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방두영 선생님이 초대 회장이 되었고,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이유로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나는 당시 장애인미술대전 주최 단체인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로부터 장애인미술대전에 출품한 작가 연락처를 받아 전국에 있는 작가들에게 전화를 하여 한국장애인미술협회의 출범을 알리고 회원가입 권고를 하였다.

사무실도 없던 시절이라 창립전 도록을 보면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사무실 연락처로 적혀 있다. 장거리 전화요금 등을 사비로 충당하며 일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지방에 사는 어떤 장애인화가는 거기 가입하면 무엇을 주느냐고 묻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어렵게 회원을 모아 대한민국장애인미술협회 창립전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열심히 작업 하는 작가들은 100호의 대작들을 출품하였고 사회를 맡은 나의 목소리도 감격하여 떨리고 있었다.

장애인미술협회가 탄생하는데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셨지만 당시 이화여대 조각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던 최병상 선생님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결코 잊지 못할 감사한 분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탄생한 한국장애인미술협회가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대 사무국장, 운영위원, 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한 나는 장애인미술협회가 창립 당시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발전되는 협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화가로 살기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 발표를 위한 전시회도 국내외를 통해 여러 번 하였는데 특히 몇년 전에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와 미국 뉴욕 햄튼 아트페어, 마이애미 아트페어 등에 직접 참여하여 외국 작가 작품들과 내 작품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 화가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

국제 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지팡이를 짚고 계단도 오르내렸지만 나이가 들면서 근육이 약해져서 양쪽 목발을 사용하다가 지금은 휠체어를 이용한다. 미술을 하다 보면 짐이 많다. 화구, 도록 그리고 작품을 갖고 다녀야 할 때가 많다.

짐이 많을 때는 아내와 동행을 해야 한다. 체구도 작고 약한 아내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화가 그것도 장애인화가 부인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적 노동 외에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짊어져야 하는 고단한 삶이지만 아내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내 곁을 지켜 주는 아내를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작품에 매진한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을 묻고 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을 만큼 장애인화가의 생활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좋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오늘도 붓을 잡는다. 내 작가 노트에 적혀 있는 한 문장 ‘예술은 긴장인 동시에 해방이다.’를 떠올리면서.
 

 

 

# 주요 경력

선사랑 드로잉회 운영위원, 부회장 역임, 한일현대미술작가회 운영위원 역임 경기국제미술창작협회 서양화분과장 역임, 홍익대학교 총장상 수상 (사)황정장애인문화예술원 강사 역임, (사)한국미술협회 윤리장학위원회 위원 역임 김영빈화실, 선화실, (관인)입시전문 미림미술학원 원장 역임 외.

#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회원 (사)대한민국창작미술협회 운영위원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이사 한국척수장애인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장애인사진협회 부회장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추천작가 외.

# 작품 소장처

광명시청 : 추억 (Rememberance), 2000, 60.6x72.7cm (20F), Mixed Media on Canvas 안산시청 : 그리움 (Yearning), 2008, 22.1x15.8cm (1F), Oil on Canvas 민락중학교內 민락아트홀 : 화호(和好)(harmony) 2004, 22.1x15.8cm (1F), Oil on Canvas 하남문화예술회관 : 가을의 음률 (Rhythm of the Autumn), 2007, 116.8x91.0cm (50F), Oil on Canvas 대전예향갤러리 : 달콤한 유혹 (Sweet Temptation), 2009, 45.5x37.9cm (8F), Oil on Canvas 예일화랑 : 슬픔 (Sadness), 2003, 31.8x40.9cm (6F), Oil on Canvas 겨울 (Winter), 2003, 38.5x25.5cm, Water color & Colored pencil on Paper (주)가남환경(가평) : 초가 풍경 (Scenery in a house with a straw), 1989, 90.9x65.1cm (30P), Oil on Canvas 달동네의 황혼 (Twilight of the deprived), 1990, 145.5x112.1cm (80F), Oil on Canvas 송 소아과(속초) : 여울목 (The neck of the Rapids), 2008, 22.1x15.8cm (1F), Oil on Canvas Fragrance No.114, 2010, 45.5x53.0cm (10F), Mixed Media on Canvas 한국정보화진흥원 : 강변의 추억 (Remembrance of Riverside), 2009, 53.0x45.5cm (10F), Oil on Canvas 한국전력공사(서울) : Fragrance No.305, 2010, 90.9x65.1cm (30F), Mixed Media on Canvas 예술의 전당(서울) : 행복나무 (Happy Tree), 2012, 60.8x115.5cm (≒40M), Oil on Steel door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서울) : 처음에 우리는 (At the first time, we), 2008, 53.0x45.5cm (10F), Oil on Canvas 外 외국 컬렉터, 기관 다수 소장 외.

# 전시 및 수상

개인전 15회, 아트페어 12회(국내·외), 단체전 300여 회(국내·외)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대상 수상(2012), 대한민국장애인예술대상(2016) 및 각종 미술대전 입상 30여 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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