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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260권 발간 기록 작가, 고정욱
emiji 조회수:557 211.193.40.173
2017-03-27 14:50:00

우리나라 최초로 260권 발간 기록을 세운 작가, 고정욱


"나의 ‘문학’, 상처받고 소외받는 이들 다독거려 주어야"

 

고정욱 작가.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고정욱 작가
 
      
장애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어린 시절 성탄절 즈음이면 흑백텔레비전은 예수님 관련 영화를 화면에 띄웠다. 평소에 보기 힘든 대작 영화들이라 어린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그런 영화를 끝까지 보곤 했다.

그 가운데 한 영화에서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이 장애를 가진 여인에게 다가가 일어나 걷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주님. 주님을 뵌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축복을 준 뒤 무리를 이끌고 지나갔고 여인은 그냥 장애인으로 남았다. 그저 지극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 시절 나는 하늘을 원망한 적이 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되었느냐고……. 다른 것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나에게는 장애가 치명적 약점이었다.

간절히 하고픈 반장도 할 수 없었고, 동네에 나가 친구들과 뛰놀 수도 없었다. 장애는 그야말로 어린 영혼의 족쇄였고 거부할 수없는 숙명이었다.

아무리 해답을 찾으려 해도 내 장애의 원인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의 해답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건 어린아이가 해야 할 질문이나 고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해맑은 얼굴은 어두워졌다. 어린 시절 찍은 사진 가운데 환하게 웃으며 찍은 것이 변변히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풀리지 않은 고민을 끝없이 해대니 왜 안 그렇겠는가. 장애아였던 나는 그렇게 골치 아프고 해답 없는 문제를 품에 안은 채 성장했고, 매일 만나는 장애의 고통과 그로 인한 세상의 차별과 편견을 경험해야 했다. 때론 싸우고, 때론 무시하고, 때론 무기력하게 당하면서…….
 
고정욱 작가의 백일사진.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백일사진
 
    
장애는 부끄러운 일도, 상 받을 일도 아니다

“정욱이 어머니, 졸업식 날은 옷 좀 예쁘게 입고 오세요.” 70년대 초반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방과 후에 학교에 온 어머니에게 담임선생님이 한 말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복장은 늘 작업 바지나 월남치마 차림이었다. 장애아인 나를 아침저녁으로 업어서 학교에 데리고 다니려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아니, 왜요?”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께서 장한 어머니상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늘 기어서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간혹 아버지가 안아서 동네 한 바퀴를 돌려주면 그건 정말 큰 기쁨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늘상 나가 뛰노는 골목길이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장애 소년에게 유일한 구원은 책읽기. 책만 펼치면 나는 톰 소여와 함께 미시시피 강에서 뗏목을 탔고, 달타냥을 비롯한 삼총사들과 모험을 펼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책벌레가 되었다. 밖에 나가 뛰 놀지 못하는 대신 나에겐 그런 친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내 인생에 폭탄이 터졌으니 그것은 바로 ‘취학 통지서’였다. 장애인의 운명은 대개 이 취학 통지서에 의해 결정된다. 대개 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수십 년을 머무는 재가(在家) 장애인이 되기 때문이다.

“정욱아, 업혀라. 학교 가자.” 어머니는 입학식 날 나를 향해 등을 돌리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 등에 업혀 500미터쯤 떨어진 학교로 향했다. 가슴에 손수건을 매단 또래 꼬맹이들이 업혀서 학교 가는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했다.
 
초등학교 때 가족사진.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초등학교 때 가족사진
      

그 시선은 학교에 가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비로소 내가 남들과 다른 장애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고난의 행군은 시작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니는 나를 업고 학교를 갔다. 지각, 결석, 조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한 번 학교 교실에 데려다 놓고 집에 와서 살림을 하다가 오후에 한 번 더 학교에 와서 나를 업고 집에 와야 했다. 그 덕에 우리 집은 어머니가 살림을 제대로 할 시간이 부족해 늘 폭탄 맞은집 같았다. 동생들이 어질러 놓은 물건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초·중·고 12년 개근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때론 혀를 끌끌 차는 주위의 시선도 있었다. “멀쩡한 애가 왜 업혔누?” “병신인 모양이야.” 지나가는 할머니들이 마치 못 볼 것 본 것처럼 말해도 어머니는 꿋꿋했다.

그러나 그 속은 어땠을지 조금은 상상이 된다. 장애인은 그 주위 가족, 친구 까지도 장애의 느낌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점점 자라면서 덩치가 커지는 것도 문제였다. 아이들의 성장은 엄마의 기쁨이겠지만 그런 아들을 업고 다녀야 하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한 해 한 해 체력이 떨어지셨을 텐데 아들은 점점 더 무거워지니. 봄부터 가을까지는 나를 업은 어머니 목덜미에서 굵은 땀방울 흐르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잔소리 한번 하신 적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나를 업은 팔에 힘을 줄뿐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을 보는 아들인 나. 어찌 감히 허튼 생각을 할 것인가. 어머니의 그런 땀과 노력과 희생을 헛되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어떤 가르침보다 더 큰 가르침이 나를 휘감아 돌았던 것이다. 어머니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바친 희생의 전형이었다.

장한 어머니상을 드리겠다는 담임선생님께 어머니는 감정을 조절하며 말했다. “선생님, 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기 자식이 몸이 불편해도 학교 가겠다는데 업어서 나르지 않겠습니까? 이건 엄마라면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 왜 상을 주신다고 하세요? 저는 그런 상 안 받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나를 업고 쌩하니 집으로 오셨다.

싸늘한 어머니의 얼굴 표정을 처음 본 나는 등에 업힌 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갑자기 목에 매달린 내 손등 위로 어머니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욱아, 장애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상 받을 일도 아니란다. 그건 너의 운명일 뿐이야. 그러니 주어진 운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 년간 월남에 싸우러 갔을 때도 울지 않으셨다. 아무리 살림살이가 쪼들려 끼니거리가 부족해도 울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난생처음 흐느끼며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던 그날 나는 다시 태어났다.

장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그 불리함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아갈 결심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국민교육 헌장의 한 구절처럼 나는 장애라는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게 된 것이다.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우리 어머니. 지금은 사남매를 다 키워 내보내시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지금도 운명을 헤치고 세상을 바꾸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땀에 젖은 아버지의 등

부모님은 장애가 있음에도, 혹은 장애가 있기에 강한 호기심을 가진 나를 위해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거나 하면 최대한 보여 주려 애쓰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토요일 오후에 귀가하신 아버지는 나와 동생들에게 새로운 산업전람회를 구경 가자고 하셨다. 그건 물론 나의 견문을 넓혀 주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여의도로 택시를 타고 가셨다. 요즘이야 안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런 구경거리가 무척 적을 때였다. 게다가 요즘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도 않은 시절이니 구경거리에 사람들이 몰리는 게 당연했다.

여의도 광장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나를 업고 그 줄을 보신 아버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줄의 앞부분으로 다가가 서 있는 중고생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 학생들! 미안해, 우리 애가 몸이 불편해서 새치기 좀 하자구.” 아버지의 넉살에 중고생 형들은 순순히 자리를 양보해 주어서 나는 긴 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화끈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그런 마음을 묵살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 갖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장애로 인해 동등한 조건으로 경쟁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울 바에는 비장애인들이 편의를 봐주고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나중에 커서 내가 미국 등의 선진국을 다녀 보니 장애인의 줄서기라는 건 아예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긴 줄이 늘어져 있어도 장애인은 언제나 맨 앞. 디즈니랜드를 갔을 때 미국 사는 조카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고모부, 하루에 디즈니랜드 다 볼 수 없어요. 너무 줄이 길어요.” 그러나 이게 웬일, 휠체어를 탄 내가 나타나자 각종 놀이기구 앞에 섰던 직원들이 우선적으로 오라고 하더니 제일 먼저 태워 주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신이 난 건 조카였다. 하루 만에 그 많은 놀이기구를 줄서지 않고 다 타 볼 수 있었으니, 꿈인가 생신가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새치기하는 마음은 당시로선 선진적(?)인 발상이었다.

물론 당신의 속내는 나를 업고 오랜 시간 줄서 있기 괴로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 덕에 나는 당시로서는 첨단 산업제품이던 디지털식 전자시계를 처음 구경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그 뒤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여름이었다. 나는 별로 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낚시를 좋아했다. 넓은 강이나 호숫가에 앉아 은빛 찬란한 물고기를 낚는 꿈을 늘 꾸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마음은 참으로 애타는 것이었으리라.

혼자 힘으로는 그 좋아하는 낚시를 다니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어느 날 낚시 도구를 챙겨 동생들과 함께 낚시를 가기로 했다. 직장의 동료들에게 어느 곳에 가면 물고기가 많은가를 물어보신 뒤 아버지는 파주 어디쯤의 붕어가 많이 나온다는 오리골 저수지를 알아내신 것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방학을 했지만 아버지는 휴일이 없기에 7월 17일 제헌절이 우리의 D-데이였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내 동생들은 낚시 가방을 들고, 우리는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 아버지는 나를 업고 후덥지근한 시외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이윽고 덜컹 거리며 출발했고, 우리는 한참 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구리가 풀섶 사이로 튀고 매미 소리 요란한 시골길을 아버지는 나를 업고 하염없이 걸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땀은 비 오듯 흘러 업힌 나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까. 아버지는 나를 풀섶에 앉히고 잠시 쉬었다. 그때 아버지의 등을 질펀하게 적시며 흐르는 땀을 나는 보았다. “아버지, 너무 힘드시죠?” 내가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워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말씀. “괜찮다. 우리 아들이 낚시를 하고 싶다는데 내가 어딘들 못 가겠냐?” 난 그 말씀에 목이 메었다. 그날 나는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다. 더운 여름날의 대낮 낚시가 잘 될 리 없는 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낚은 것이 분명 있었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 덕에 나는 1급 지체장애를 가지고도 작가로서 활동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도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살핀다. 장애가 있지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는 법을 배운 것은 오롯이 나의 아버지의 땀에 젖은 등 때문이다.

 


햄 앤드 에그

외국에 여행을 가보면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대개 가벼운 것들이다. 빵에다 간단한 음료와 햄 앤드 에그 (Ham & Egg) 인 경우가 많다. 식빵에 이걸 넣어서 먹으면 아침 식사가 가볍게 해결된다. 언젠가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이 동료에게 햄과 에그 중에 어느 게 더 고귀하냐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건 영화 속의 동료나 그 영화를 보는 관객인 나나 마찬가지였다.

한 끼의 메뉴에 불과한 그것들 가운데 더 고귀한 게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해석은 멋졌다. 햄은 돼지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라고 했다. 하지만 에그는 일부만 나눠 주는 것이기에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햄이 더 고귀하다는 게 결론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 돼지가 우리에게 햄을 제공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친 희생이었다.

한번 바치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고귀한 희생. 그리고 에그는 닭이 만들 수 있는 많은 알 가운데 하나를 주는 것이었다. 이건 협조였다.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담이 적다. 인간은 언제나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남의 신세를 지며 살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말이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인 것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은 대개 햄이나 에그 같은 사람들이다. 희생과 협조를 해 준 사람들이다. 그들의 희생과 협조 없이 나는 살 수가 없다.

아니, 인간 자체가 남과 어울려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위해 많은 희생과 협조를 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루소는 ‘희생’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희생에 의하여 생활하고 있다. 나 자신도 물론 희생하고 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부득이한 의무이다. 때문에 놀고먹는 사람들 모두 다 사기꾼이다. 사기꾼 부류에 속하지 않으려면 일해야 한다. 직업이 뭐든 상관없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아야 한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협조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 있다. 『역경』에서 언급한 말이다. 성실한 마음으로 남과 서로 친하고 협조하면 아무 허물이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가득 차서 넘칠 만큼 순수한 성의가 있으면 마침내 생각지 않은 뜻밖의 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한때 잘 나가는 수녀원 원장이었다. 인도의 귀족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교장이기도 했다. 그건 에그의 삶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경험하게 된 기차여행에서 수없이 많은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 삶의 패러다임을 희생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안락한 수녀원을 뛰쳐나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처럼 스스로 가난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비로소 가난한 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길가에 버려져 죽어 가는 사람들을 데려다 인간답게 존경받으며 죽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 수없이 많은 오해와 질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햄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두려울 리도 없었다. 데레사 수녀는 심지어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에게서 비난받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희생 하면 그들이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도와줘야 한다고……. 만일 그녀가 에그의 길을 택했다면 아마 오늘날과 같은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부유한 수녀원의 원장 수녀로 이름 없이 사라졌으리라. 나 역시 그렇게 학교를 다닐 때 모든 열정을 바쳤다. 졸업하는 날 우등상을 받았다. 그 우등상이 나만의 노력에 의해서였을까. 결코 아니다. 오로지 어머니의 단내 나는 거친 숨결이 일군 결과였다.

물론 내게는 또 수많은 에그들이 있었다. 나의 가방을 일 년 내내 들어다 준 친구들은 부지기수다. 자전거로 학교까지 날 태워다 준 친구도 있었고, 잡다한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은 나의 동생들도 있었다.

어찌 보면 오늘날까지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수없이 많은 햄과 에그를 먹은 것밖에. 이제 나는 내가 받은 햄과 에그를 남에게 돌려주려 애쓰고 있다. 나에게도 아내가 생겼고, 양육해야할 자녀들이 생겼다. 작가로서 많은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햄과 에그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햄과 에그를 먹고 여기까지 왔고 또한 누군가의 햄과 에그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이고, 더불어 사는 삶 그 자체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고등학교 3학년 때
 
  

세계를 휠체어 바퀴 삼아

해외에 나가면 누구는 명품 가게를 들르고, 누구는 야시장엘 꼭 가 본다고 한다. 대개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에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꼭 서점엘 들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료수집의 의미도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이 눈에 띄면 구매하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한마디로 직업정신의 구현인 셈이다.

내가 작가가 된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첫 저서인 『글힘돋움』이 1990년에 발간되었으니 그렇다. 25년 넘는 세월에 나는 벌써 260권의 책을 발간했다. 프로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죽기 살기로 자기의 분야에서 정진하는 것.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는 제법 많은 것을 이루었다.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 내보았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도 썼으며, 그를 위해 국내와 해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무엇보다도 전업 작가로 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행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꿈은 항상 진화하게 마련. 작은 것을 이루면 더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 삶의 속성이다. 큰 세상을 살피고 생각의 폭을 넓히다 보면 그렇게 된다.

세계 각국을 여행 다니면서 장애를 다룬 동화책이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알게 됐다. 그 어느 나라도 장애인이 주인공이거나 사건에 등장하는 작품을 우리처럼 많이 발간하지 않았다. 서점에 나가 장애를 다룬 동화나 책을 찾자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쓴 작품도 제법 많다. 선진국에 가서 그런 책을 찾으면 몇 권 되지 않는다.

나 같은 장애인작가가 별로 없을 뿐더러 그런 영역을 전문적으로 쓸 필요성이 크지 않단다. 장애인 인권이 그만치 신장되어서일까? 아니면 이미 사회 보장이 잘 되어 더 이상 장애인의 투쟁이나 몸부림이 필요 없어서일까? 그들은 내가 장애를 가졌음에도 치열하게 작품을 써낸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중국이나 몽골, 캄보디아나 아랍권의 나라에 가보니 그곳은 또 다른 양상이다. 장애의 문제는 정말 절박하여서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여전히 장애인은 천벌 받은 사람,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여긴다. 인권 향상과 인간 대접은 요원하기 짝이 없다. 아니, 편의시설이 부족해 장애인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도 그걸 체계화하고 논리적으로 문제 제기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니 작가가 나오기는 더더욱 난망이다. 장애인은 아예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장애인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면서 장애인 인권 향상이 진행 중인 중간 지점에 우리나라가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과 사명은 명확해진다.

내 삶의 문제가 응축되고 고민이 녹아 있는 내 작품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소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장애인들의 인권을 신장하는데 단초가 되어야 한다. 휠체어에 몸을 실어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이 세상 곳곳에 장애인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널리 알려야 한다. 세상은 어린이의 권리도 보장하고, 여성의 평등도 인정하며, 피부색의 차별도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바로 장애인의 권리 신장이며 인격 존중이고 차별 금지뿐이기 때문이다. 1급 장애인인 내 어깨가 무겁다.

 


문학의 여정

아무튼 나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학교를 다녔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92년에는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오늘날까지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무려 25년의 세월이 지났다.

소설은 물론이고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동화를 발표해 주목받고 있으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5월의 선정도서가 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작가로서 남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동화를 쓸 때 거의 모든 작품에 장애인을 등장시킨다.

주제도 장애인을 위한 것들로 국한하고 있다. 이처럼 장애에 관련된 동화를 쓰게 된 이유는 내가 장애인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은 뇌성마비 종식이의 이야기다. 『안내견 탄실이』는 시각장애를 다루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종 다양한 장애가 그대로 나의 소재가 되었다.

글쟁이로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또 어린이들에게 읽을 만한 글을 선물하겠다고 작정을 한 뒤 나는 장애에 관한 글을 주로 쓰겠노라 마음먹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싸우고 도전해 왔던 내 삶의 작은 결론이기도 하다. 지금 이 사회를 이끌고 있는 어른들이 살아온 지난 시절은 장애인들을 놀리고, 비하하고 사람 취급 하지 않던 때였다.

그러한 이들이 커서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역시 그렇기에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크게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나의 성장기는 그야말로 장애의 투쟁 역사였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의대 입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내 대학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은 의대나 공대 자연계 학과의 입학이 거부된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국문학. 완전히 다른 세계인 문학 전공의 길로 들어서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적응하기 위해 애썼고, 배수진을 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과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문과 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곧 적응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어려서 책을 많이 읽은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나의 운명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서히 들었다. 작가로서 성공해 보이고 모든 것을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하고 싶다는 일념에 불탔다. 나는 장애만 있을 뿐 다른 분야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강연 모습. ⓒ한국장애예술인협회  강연 모습
 
      

불가능한 취업

그 후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장애는 이때도 여전히 나의 발목을 잡았다. 서류심사에서 1순위여도 마지막 이사장 면접에서 떨어지길 여러 번. 그 덕에 나는 아직도 대학의 시간강사 신세다.

저런 장애인은 사회의 지도층 인사인 자신이 떨어뜨리지 않게 밑에서 알아서 서류 심사를 통해 떨어뜨렸어야 한다는 말이 들려온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한 어른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나는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해 왔다.

하지만 이룬 결과는 여전히 미미하다. 아직도 장애인들은 버스를 타고 마음껏 원하는 곳을 갈 수도 없고,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힘들다. 취직, 결혼, 교육…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될 기미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아침 일찍 일터로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는 가족과 함께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는 것이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리고 꼭 지켜 내야 할 삶의 기본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이는 그림의 떡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높은 실업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1990년 설립되었을 때 장애인고용의무사업장의 장애인고용률은 0.43%였다. 물론 지금은 2.28%까지 올라왔고 다양하게 직업에 대한 각종 제도를 마련했지만 나와 같은 정신노동의 고학력 장애인에게 열린 직장은 없었다. 특히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가장 보수적인 곳이며, 가장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심한 곳이기도 했다. 응모 회수가 늘면 늘 수록 나와 가족이 받는 상처는 커 가기만 했다.



고마운 깨달음

이 무렵 나는 동화를 쓰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이러한 생각을 가슴 깊은 곳에 깔아 두고 살았다. 왜 하필 내가 장애인이 되어서 이런 천대와 차별을 받아야 하나 하고 말이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 고비에서 나는 항상 장애로 인해 좌절을 맛봐야 했다.

교육, 진학, 결혼, 취직 등.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장애로 인한 자괴감뿐 이었다. 물론 그런 자괴감을 딛고 앞에 놓인 장애물을 돌아가 다른 길을 또 열심히 가곤 했지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비애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이렇게 장애인이 된 것은 바로 이런 문학을 통해 장애의 고통을 널리 알리라는 뜻임을. 내가 아니면 누가 장애를 글로 써서 남에게 알릴 것이며 어린이들에게 장애인도 우리의 친구임을 깨닫게 할 것인가.

기독교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에게 장애를 견뎌 내고 널리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할 만하기에 장애의 굴레를 씌워 이 땅에 내려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소명의식을 갖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불교로 말하자면 이번 생에서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장애인들의 고통을 직접 느끼면서 그들을 위한 삶을 살면서 업을 풀라는 의미 정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열심히 작품을 쓰고 정말 최선을 다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다 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일이 바로 장애로 인해 의미 있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는 거다.

그렇게 강연에 응하다 보니 강연 열풍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기업체, 교육지원청, 각급 학교, 사회단체, 도서관 등. 일 년에 강연을 300여 회를 하게 되니 이건 직업이 작가에서 강사로 바뀔 지경이다. 하루에 두세 개의 강연을 전국으로 다니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나를 통해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하는 일은 보람이 큰일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독서를 진작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 면서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큰일이었다.

내 자존감 상승은 물론이고 동료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기쁨도 있었다. 가끔 강연을 가면 어린이 친구들을 만난다. 그때 장애인용 주차장에 차를 댈 것인가, 장애인 친구를 따돌리고 차별할 것인가 등등을 물어보면 큰소리로 “아니오.”라고 대답해 준다.

그렇게 큰소리로 외치며 대답하는 어린이들의 그 착한 마음이 오래오래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면 참 좋겠다. 그 어린 이들이 훗날 이 세상을 넘겨받고 이끌게 되면 분명 장애인들을 차별하거나 따돌리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말의 두려움도 있다. 아무리 어린이들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 없이 이 세상을 이끌어 가려 해도 그 어린이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부모들은 여전히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백지 상태의 아이들 마음에 편견이나 냉대의 어두운 색을 칠해 버리면 어쩔까 싶다.

그런 때 내 동화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다시 하얗게 만들어 주고 곱고 영롱한 사랑의 색으로 채색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결국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보다 개선시키는 일은 한두 가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변화, 발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장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가당치 않은 노력이며 당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안도 있다. 동료 작가들이 이제 하나씩, 둘씩 장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나가 봐도 장애인의 날 정도 되면 아예 한 매대가 장애인 관련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물론 거기엔 내 작품도 많지만 다른 동화작가들이 쓴 작품도 많다. 이제 그야말로 장애가 아동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도 그러니 힘이 나고 외롭지 않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작가들이 부지런히 싸워 줄 테니 말이다. 어린이들도 내 작품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장애인 친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희생과 봉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잘 몰라서 이겠지만 장애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와 정반대의 시각을 지니거나 결론을 내리는 일은 삼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애인들은 통합교육을 부르짖고 있는데 작품 말미에서 엉뚱하게 친구들과 잘 지내던 아이가 특수학교로 전학을 간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다.

그건 장애인들을 안 보이는 곳에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비장애인들의 편견을 조장하고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널리 유포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기에 그러한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아찔함을 느낀다.

 


서점 매대

문학이 장애를 다루는 일, 그것은 상처받고 소외 받은 사람들을 다독거려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읽고 가슴 아프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읽고 감동하고 그들이 읽고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에 장애를 다룬 작품을 쓰는 일은 조심스럽고 늘 두렵다.

그리고 과연 내가 쓰는 작품은 정말 장애인들을 위하고 이 사회를 위한 것인가를 항상 반성하게 된다. 더욱 긴장하고 더욱 노력해야 할 대목이다. 모든 장애인, 더 나아가 비장애인의 롤모델이 되어서 이 세상을 더불어 사는 곳으로 만들도록 초석을 놓는 일. 그것이 나의 사명임을 깨닫고 사는 나날. 행복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점 매대.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서점 매대
 
      
고정욱 작가

# 주요 경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국문학 박사)
평화방송 TV,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다수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역임
장애인을 위한 <새날도서관> 관장 역임
삼애복지포럼 총무 역임
한국DPI 이사 역임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이사 역임
국립중앙도서관 소리책 자문위원 역임
현 한국장애고용공단 편집위원
한국지역난방공사 사회공헌 자문위원
국제아동도서위원회(KBBY) 운영위원
장애인식 개선 강사로 전국 초·중·고 및 도서관, 지자체 등 연 평균 300회 이상 강연
저서 『가방 들어주는 아이』 외 260권

# 수상 경력

1992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1993 제14회 호국문예 중편소설 입상
1997 삼애봉사상
1997 성균문학상
2003 MBC-TV‘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 선정
2009 한정동 문학상
2010 한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2011 보건복지부 이달의 나눔인상
 
저서모음1.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저서모음1.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저서모음2.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저서모음2. ⓒ한국장애예술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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